[엘르보이스]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감각

가능성은 여기에서 생긴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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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가능성  
성폭력 근절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에 다녀왔다. 특히 고위 공무원들의 성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 초안을 자문하는 자리였다. 한국에서 과연 성폭력 근절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능성을 늘리려면 더 다양한 의견이 모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니컬한 마음을 누르며 회의에 참여했다. 그런데 주무 기관에서 만든 몇 가지 정책을 보니 ‘이럴 줄 알았다’는 마음이 올라오면서 화가 났다. 이미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 것들을 ‘재탕’하거나 문제의 핵심과는 거리가 있는 정책이 대부분이었다. 주무 기관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엔 범죄는 발생하고, 또 어떤 정책을 내놓든 ‘여성 편만 든다’는 민원이 쇄도하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서 고민해야 하는 입장도 이해는 됐다. 하지만 지난해 일어난 강력 범죄 중 성폭력의 비율이 90%가 넘는 상황에서 모두를 위한 정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내가 이 회의에 참여한 것이 정말 가능성을 늘리는 일이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래도 희망을 품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회의에서 20~30대 여성 국회의원들이 내놓은 법안과 제안이 거론될 때였다. 특히 용혜인 의원이 개최한 토론회에서 나온 제안은 면밀히 검토해서 빠르게 적용해야 하는 의견으로 다뤄지기도 했다. 이들이 지난 6월에 임기를 시작해 일한 지 2개월이 조금 지난 초선 의원이라는 걸 생각할 때, 어떤 문제를 자신의 주요 의제로 풀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해답 말고, 이걸 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제안들. 이 제안이 이전 국회보다 더 활발하게 논의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법이 되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닿자, 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도 이들처럼 내 자리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풀어보고 싶었다.
 
이와 비슷한 마음을 지난 7월에도 품었다. 최연소 미국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의 모습을 보았을 때다. 이 연설에서 그는 자신에게 성차별적 폭언을 한 테드 요호 공화당 의원의 사과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의사를 밝혔다. “나도 딸이 있다”며 사과한 요호 의원의 말에 “딸이 있다고 좋은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존중해야 좋은 남자가 되는 것”이라고 받아치면서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 위해 여성과 아내, 딸을 방패 삼는 것에 분노한다고 얘기했다. 자신도 누군가의 딸이라고, 부모님께 내가 남성들의 모욕을 그냥 넘기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부분에서 오카시오 코르테즈 의원의 용기와 결단에 손뼉을 쳤다. 〈뉴욕 타임스〉는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해 이런 일이 생겨도 반박하지 못했던 이전의 정치인들과 비교하며, 이번 연설이 정치 변화를 의미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언어나 폭력이 만연해 있고, 또 이와 관련된 사건이 연속으로 터진 7월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무력해질 무렵, 이전과 같은 대처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동시대 여성의 목소리 덕분에 ‘아, 맞다.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감각’, 즉 동시대성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동시대 여성들이 자신이 해야 할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자 엄청난 격려가 된다.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이용해 이전과는 다르게 일을 해내고, 이 과정을 통해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내 능력이 만들 다른 판, 다른 일의 과정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됐다. 이들은 경력이 화려하기 때문에, 학교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이 누군지 알기 때문에, ‘나답게’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변화를 나도 만들어볼 수 있을까. 무기력함 대신 경험에 의미를 두고 한 걸음 걸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를 살피고, 나에게 영감을 주는 동시대 여성들의 말과 발걸음에 주목하고 싶다. 이렇게 연결된 우리가 만들어갈 변화가 내가 있는 이곳을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본다. 가능성은 여기서 생긴다고 믿는다.  
 
writer_ 홍진아
밀레니얼 여성들의 일과 삶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 대표. 8명의 여성 창업가를 인터뷰한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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