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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과거완료 시제를 남발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돈 얘기를 할 때 그랬다. “그때 아파트를 샀어야 하는데 빌라를 샀어.” “잠실 주공이 1억 원일 때 살 수 있었는데….” 놓친 기회에 대한 회한이 다양한 조동사에 담겨 튀어나왔다. 나는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자꾸 뒤돌아보는 사람이 멋있기는 어려우니까. 하지만 기회를 붙잡아 부자 어른이 되는 길은 더 멀어 보였다. 잡지사에서 20년을 일한 내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숫자에 약하고 쇼핑에 강했다. 나 역시 적금을 모아 전세금에 묻어두는 것 외엔 다른 재테크를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주식을 시작하게 됐을까? 그렇다, 내가 바로 뉴스에 나오는 동학 개미다. 현재진행형의 경제력
」‘동학 개미 운동’이란 코로나19 이후 외국인과 기관이 주식을 대거 매도하는 시장에서 개인 투자자들이 열심히 매수하는 상황을 ‘동학농민운동’에 비유한 신조어다. 우리 민족은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할 정도로 대의를 위해 희생해온 역사가 있긴 하다. 하지만 봉건제와 외세에 맞서 싸웠던 농민 봉기처럼 무너지는 주식시장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개인 투자자들이 떨쳐 일어선 걸까? 그보다 이번 주가 폭락의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거다.
내 경우엔 카카오뱅크에서 1만 원을 입금해 준다는 미끼 이벤트에 솔깃해서 3월 어느 날 주식 계좌를 만들었는데 두 달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 돈 2000만 원이 들어가 있었다. 마침 코로나 시국으로 미팅이나 촬영이 취소돼 시간도 많아졌기에 짬짬이 모바일 주식 앱을 열어 이것저것 사고팔아봤다. 고인 물처럼 정체돼 있던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 동안 오르내리는 그래프와 쉼 없이 바뀌는 숫자가 뜻밖의 자극이 됐다.
‘주린이(주식 어린이)’가 되자 보고 듣는 모든 것에 새로운 프레임이 생겼다. 산업을 소비자가 아니라 투자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빙그레우스’ 캐릭터가 너무 웃겨서 빙그레 주식을 샀다(22%가 올랐다). 조미료 연두를 사용한 레서피가 트위터에 유행하길래 샘표와 샘표식품 주식을 샀다(각기 34%, 18% 올랐다).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쇼핑을 많이 하게 되니 전자결제 업체인 NHN한국사이버결제를 매수했다(37% 상승했다). 코로나 진단 키트 관련주를 샀다가 상한가를 찍어보는 경험도 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소액으로 여러 종목에 투자한 만큼 큰 수익을 내지는 못했지만 내 예측이 맞아떨어진다는 쾌감, 눈으로 보이는 숫자가 주는 성취감이 컸다. 그러나 주식은 게임이 아니고 나는 천재가 아니다. 예상대로 되어가지 않아 손실을 본 종목도 여럿 생겼다. 마음이 아프니까 구체적인 종목과 하락률은 언급하지 않겠다.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데, 정작 그래프 속을 통과할 때는 어디가 무릎인지 어깨인지 보이지 않는다. 돈을 잃은 두려움도, 더 큰 돈을 탐하는 욕심도 시야를 어둡게 한다. 무엇보다 주식과 관련해 내가 가장 공감한 말은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이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주식을 해서 번 돈은 100만 원 정도, 그리고 같은 기간 당근마켓으로 번 돈이 30만원쯤이다. 두 달 동안 5%라면 초저금리 시대에 나쁘지 않은 성과지만, 거기에 들어간 시간과 노심초사한 가치를 따져보면 남는 장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처럼 겁 많은 사람은 큰돈을 잃을 일은 없지만, 큰돈을 벌 일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코로나 사태가 조금씩 완화되며 그 사이 나는 본업으로 바빠졌다. 이제는 장기 투자할 종목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정리한 다음, 일희일비를 떠나 오래 묻어두려고 한다. 자꾸 증권사 앱을 들여다보는 어른도 별로 멋있지 않은 것 같아서다.
노동 소득 외에 재산 소득 구조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건 은퇴가 다가올수록 강하게 느낀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내 돈을 일하게 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주식은 일을 시켜놓고 감시하는 에너지가 크다. 감시를 덜해도 되는 방식도 있는데, 내 경우 조그만 빌라를 사서 받고 있는 월세가 그렇다. 13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았을 때 이건 함부로 쪼개거나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냥 목돈이 아니라 열심히 살았던 내 30대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연간 수익률은 5.4%. 주식보다 한참 낮지만, 잊을 만하면 통장에 입금되는 월세가 안정감을 준다. 잊어버려도 되는 자유가 달콤하다. 조금씩 월세 소득 액수를 높여가는 게 지금의 내 목표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경매든, 재테크는 자신의 성격과 그릇, 여건에 맞춰 해나가면 된다. 그러려면 일단 당장 욕망을 참아도 봐야 한다. 작은 손실을 감당해 보는 경험도 필요하다. 언젠가 은퇴 후에 돈이 일하는지 감시하는 게 주 업무가 될 테니, 밑천도 마련하고 연습도 해둬야 할 것이다. 바짝 벌어 일찍 은퇴하는 파이어족도 있다지만, 나는 그날을 최대한 늦추고 싶다. 내 일을 집중해서 잘해내는, 일하면서 자꾸 새로워지는, 그래서 현역으로 오래 일하는 어른이고 싶다. 과거완료보다 현재진행형의 인생이 내게는 진짜 같다.
WRITER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애호가.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