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에게 내가 친구 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

©unsplash
초등학생 때 사소한 이유로 친구와 싸운 적 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 같은 반 노상식(가명)이 뒤를 쫓아오며 내 책가방 밑동을 자꾸 발로 찼다. 결국 가방에 들어 있던 우유가 터졌다. 이미 사물함에서 며칠이나 묵은 흰 우유였다. 꼬릿한 냄새에 젖어버린 교과서와 공책, 필통…. 마침내 엉덩이까지 축축해진 순간에는 저 하늘 어디선가 계시가 들려온 것 같았다. 짓궂은 상식이가 사과 대신 훌라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바람에 결국 급속도로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나는 힘이 세지만 기술이 없었고, 놈은 잽싸고 얍삽한 대신 비실비실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뜯길 대로 뜯긴 채 무승부 사태에 직면했다. 나는 우유 테러범을 혼쭐내고 싶은 나머지 거의 이성을 잃었다. 그래서일까? 입에서 절로 상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야, 이 XXXX야. 나한테는 XX, 초능력이 있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다고. XX 두고 봐라. 너는 곧 하늘나라에 갈 테니깐.” “웃기네, 뻐, 뻥치시네.” 놀랍게도 상식이는 크게 동요했고, 나는 눈알을 있는 대로 희번덕거리며 쐐기를 박았다. “아니? 거짓말 아닌데? 오늘밤 초능력으로 널 제거해 버릴 거야아아악-!”
찌그러진 우유 팩을 패대기친 채 집에 돌아온 나는 일단 쭈글쭈글해진 책이며 공책들을 드라이어와 고데기로 수습했다. 몇백 쪽의 종이를 한 장 한 장 펴는 건 고됐지만, 하다 보니 단순 노동 특유의 몰입감이 있었고, 의외로 말리고 나니 냄새가 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수습이 끝나자 분노는 빠르게 식었다. 저녁밥까지 거나하게 먹은 후엔 오히려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정말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말이 씨가 되면 어쩌지? 내게 진짜 나도 모르던 초능력이 있으면 어쩌지? 고작 열 살이었던 나는 무작정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상식이가 진짜 죽어버릴까 봐 잠을 설쳤다. 늘 상상력 하나는 꽤 좋은 편이었고, 바로 그 점이 나의 최강점이자 재앙이었다. 그날 밤은 내내 이렇게 죽은 상식이와 저렇게 죽은 상식이, 죽지는 않았지만 정말 딱 죽지만은 않은 여러 가지 버전의 상식이의 잔상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왜 그렇게 나쁜 말을 했을까? 나는 순수한 소녀인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런 대장 깡패 같은 욕이 어떻게 나왔을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말이란 엎질러진 물과 같다더니 전혀 달랐다. 심지어 물 아닌 우유조차 감쪽같이 닦아냈는데 말은 다시 한다고 지난날의 과오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unsplash
다음날 아침 정수리에 먹구름을 잔뜩 매단 채 학교로 달려갔다. 다행스럽게도 상식이는 죽지 않고 어제와 다름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멀쩡한 것은 목 아래뿐 그 녀석 역시 얼굴에 짙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돌이켜보면 상식이는 상대방을 화나게 만드는 장난을 자주 치지만 본성은 나보다 순진했던 것 같다. 내가 내게 초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때, 상식이는 아예 ‘있다’고 철석같이 믿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날 우린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자꾸 눈이 마주쳤다. 나는 상식이는 진짜 멀쩡한지 흘깃거렸고, 상식이는 내가 자길 실시간으로 해칠까 봐 긴장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영영 어색해지려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가 왔다. “정지음, 나 노상식이야 미안해 이제 안 괴롭힐게 그러니까 살려줘 제발 날 저주하지 말아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지만, 당시만 해도 문자 한 통당 일일이 과금되던 시대였다. 달마다 주어졌던 50건 미만의 문자 건수를 소진하고 나면 상식이가 아니라 상식이네 고조할아버지가 와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상식이는 내 무응답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결국 난 쭈삣쭈삣 내 자리로 다가온 상식이에게서 대면 사과까지 받아냈다. “야, 미안해, 미안하다고….” 상식이는 울먹였고, 나는 있는 대로 뻐겼다. “정신 차리고 앞으론 착하게 살아라, 노상식. 그러지 않으면 바로 ‘킬(Kill)’이다.” 어린이의 마음은 왜 이리 얄궂은지! 그냥 나도 미안하다고 하면 될걸, 그 말이 나오지 않아 끝까지 넓은 아량으로 봐주는 척했다.
어느덧 그날의 우유 전쟁으로부터 20년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인스타그램 ‘알 수도 있는 친구’ 난에 그 애의 아이디가 떴다. 몰라보게 남자다워진 상식이는 여자애 가방을 발로 차는 대신 여친 가방을 척척 들어주는 젠틀남이 돼 있었다. 어떤 저주에도 걸리지 않은 채 무사히 나이 들어가는 상식이를 보며 다시 한 번 내가 그저 평범한 아이였음에 감사했다. 나는 그날을 기억해도 상식이는 전부 잊었기를 바라며 친구 신청은 하지 않았다.
Writer

이마루
콘텐츠 중독자. 쓰고 만드는 일 외에도 좋은 시민이 되려고 합니다.
Category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글 정지음
- 아트 디자이너 이소정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