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진실을 말해줘!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국내 ‘필로우맨’으로 소개가 된 작가 마틴 맥도나의 처녀작 ‘뷰티퀸’이 첫선을 보인다. 매그와 딸 모린 사이의 황량한 대화나 일상의 무료함을 담고 있는 이 연극은 희망조차 사치일 수밖에 없는 아일랜드의 잔인한 현실을 노래한다. 엄마와 딸은 서로를 저주하고 또 저주한다.::뷰티퀸, 필로우맨, 마틴 맥도나, 홍경연, 김선영, 신안진, 김준원, 두산아트센터, 뮤지컬 해븐, 잘자요 엄마, 이현정, elle.co.kr, 엘르, 엣진:: | ::뷰티퀸,필로우맨,마틴 맥도나,홍경연,김선영

“아, 그게 아닌데, 그럼 한 번만 다시 봐주실 수 있나요?”뜻밖에도 배우 김선영이 프레스 리허설 현장에서 기자석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공연이 시작되면 다시 와서 봐달라는 주문이었다. “모린 역할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라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연기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기자에게 특정 장면을 어떻게 이해했냐고 질문을 했다(그녀는 2막 후반부에 모린과 레이 대사 장면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자신의 표현이 부족했다는 듯이 다시 봐달라는 주문을 했다). 철저하게 모린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시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리허설이 끝난 후 바로 이어진 기자 회견이라 김선영은 아직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무대에서 혼연의 힘을 다한 배우와 바로 인터뷰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역할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해 좋은 인터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 배우로서 연기에 임하는 자세를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떤 보호막도 없이 자신을 벗은 배우와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연극이나 연기에 대해 가장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소 위험한 일이지만 연극 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는 실마리를 배우 김선영의 혼란에 찾을 수 있었다. 의 노처녀 모린 역할은 정말 불행하고 혼란스럽고 모진 역할이다. 그래서 무대 위에 서는 것이 숙명이라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캐릭터다. 이 연극에 대한 호감은 의 작가 마틴 맥도나의 처녀작이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또한 칠순 노모를 홀로 모시고 사는 노처녀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마샤 노먼의 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도 재미거리다. 이라 제목 때문에 생기발랄하게 행복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연극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정반대의 감성에 고통을 호소할 게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도 과연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요”, “엄마가 내 인생을 망쳤어!”라고 외치는 연극인지 아니면 마틴 맥도나만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배경은 아일랜드 리낸의 황량하고 외딴 농가다. 평생 두 남자하고만 연애를 해 본 마흔 살의 노처녀 모린은 신경과민에 방광염마저 앓고 있는 엄마 매그와 함께 살고 있다. 매그는 모린이 남자를 만나면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그녀의 연애를 방해하려 든다. 딸에게 아이처럼 분유나 죽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엄마 매그의 모습은 의 부녀관계를 연상시킨다. 적어도 1막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나 이야기는 다소 비슷하다. “난 절대 안 죽어. 일흔 살이 돼서야 내 장례식을 치르게 될 걸. 그때 애프터쉐이브 냄새를 풍기며 네 허리에 팔을 두를 남자 몇이나 있겠니?”라며 저주를 퍼붓는 엄마. “더블린의 살인자가 도끼로 엄마 목을 퍽 잘라주면 좋겠어!”라고 엄마에게 진저리를 치는 딸. 사랑할 줄 모르는 시람들의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연극은 맥을 같이 한다. flashObject2('winTop','/elle/svc/elle_admin/etc/Sub_Video_Player.swf', '100%', '320', 'flvpath=rtmp://movie.atzine.com/vod/REPOSITORY/2010/01/21/MOV/SRC/01AST022010012164189019148.FLV',','transparent'); 그러나 엄마 매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2막에서는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단순히 이야기의 포인트가 다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맥도나의 솜씨는 길고 지루한 반복적인 일상을 비균질하고 낯설게 만드는 데 있다. 의 모녀 관계는 서로 소통이 부족하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드라마다. 두 사람이 결코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딸은 자살에 이르고, 이를 막을 수 없는 엄마의 아픔이 비극을 낳는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에서 모녀 캐릭터는 깔끔하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며 소통한다. 관객과 함께 ‘세상에 소통이 부재한다’는 테마로 소통한다. 한마디로 드라마의 몰입을 요청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무대 위나 관객석 모두가 눈물 바다가 된다. 반면 은 이런 감정적 슬픔이나 눈물이 아니다. 차라리 ‘분열’이라고 칭하고 싶다. 가면 갈수록 캐릭터들의 말장난처럼 반복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런 대사들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대신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어머니의 자살을 겪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이 반복을 통해 욕망을 드러낸 것처럼 맥도나의 대사들도 캐릭터들의 강박이나 무의식 등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딸의 편지를 태우기 위해 엄마 매그가 사용하던 부지깽이를 모린이 추억의 물건이라며 팔지 않는 모습이나 마지막 장면에 매그의 의자에 앉아, 엄마처럼 레이를 파토로 부르는 대사 등은 매그가 모린이 되어 가고 있다는 암시를 남긴다. 결코 집을 떠나지 못하는 매그는 마치 의 노만 베이츠처럼 죄책감으로 점점 엄마가 된다. 이런 구조를 어머니의 부재를 통해 드러내는 방식은 간극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처럼 파토스의 폭발이나 눈물로 감정을 치유하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은 없다. 은 모든 문제를 유보하고 중지시키며 서스펜스 상태로 내버려둔다. 그렇게 소통의 부재를 직접 체험하게 만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자리에 위치한 딸을 바라보게 만든다. 와 출발점은 같았으나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고향 리낸을 떠나려 할수록 폐소공포증(신경증)에 시달리고, 엄마를 벗어나려 할수록 엄마의 늪에 빠지는 정체성의 덫을 제시한다. 더욱이 이 연극은 엄마와 딸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고향 리낸이 외부인들에게는 캘린더나 사진 작가의 영상에 포착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이겠지만, 그 절경이 이들에게는 저주다. 고향이 숙명처럼 던져주는 불행을 표현하기 위해 맥도나의 연극은 두 명의 남자 파토와 레이를 필요로 한다. 어린 시절 놀던 공을 모린의 집에서 찾게 된 레이가 광기를 일으키는 것도, 아무리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 모린의 집처럼 폐쇄적인 리낸의 기운이 병적으로 감돌기 때문이다. 결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1970년대 초 스코틀랜드가 무대)처럼 종이 울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리낸의 뷰티퀸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