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에선 해 질 일 없다고 했던가요? 2023 가을/겨울 런던패션위크에서 결코 지지 않는 건 다름 아닌 꽃이었습니다. 심지어 2023 가을/겨울 런던패션위크를 발표하는 시즌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새로운 수장 다니엘 리의 첫 번째 버버리 컬렉션. 다니엘은 가장 영국적인 것에 주목했습니다. 한동안 사라졌던 기사 로고를 부활시키고, 비바람이 불어 오리 구경하기에 딱 좋은 몹시도 ‘영국적인’ 날씨에 어울리는 컬렉션을 완성했으니까요. 쇼가 시작되기 전 쇼장에선 핫 토디 음료가 곳곳에서 서빙되고 있었고, 관람석엔 두터운 담요가 깔려있어 마치 캠핑장에 나온 듯했습니다. 한편 컬렉션에선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꽃이자, 영국의 국화인 장미가 빠질 수 없었죠. 장미는 보색의 강렬한 프린트로 재현돼 티셔츠와 팬츠, 드레스, 레인코트, 두툼한 인조 퍼코트로 피어나는가 하면, 장미 꽃송이는 또 한 번 입체적으로 재현돼 드레시한 슈즈와 클러치백으로 변모했습니다.
버버리가 축축한 영국의 날씨를 떠올리는 베뉴를 완성했다면 리처드 퀸의 컬렉션은 완벽하게 가꾼 영국식 정원을 배경으로 펼쳐졌습니다.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쇼장엔 장미를 비롯한 수만 송이의 생화가 배치돼 런웨이가 곧 아주 큰 정원이 되어버렸거든요. 컬렉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꽃밭 그 자체였습니다. 격식 있는 롱 드레스와 이브닝 드레스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플라워 모티브는 형형색색의 프린트로 묘사되고, 코르사주처럼 포인트로 활용되거나, 비즈로 섬세하게 꿴 자수 장식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왕실의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듯한 귀족적인 자태의 모델은 풍성한 부케를 들고 런웨이를 걸어 나오기도 했고요.
수잔 팡의 쇼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코를 간지럽히는 싱그러운 장미 향기였습니다. 곧 그 출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쇼장 가운데는 어마어마한 양의 말린 장미가 깔려있었거든요. 그 장미 꽃길을 자박자박 밟으면서 모델은 워킹을 시작했습니다. 포근한 파스텔 빛이 어린 컵케이크처럼 풍성한 드레스와 꽃장식의 니트웨어, 블라우스, 셔츠 등의 의상이 장미 모양 링, 꽃장식의 토트백 등의 액세서리와 함께 캣워크에 올랐습니다. 몇몇 모델은 종종 호스로 연결된 수통을 등에 업고 나와 장미수의 증기를 뿜어내는 퍼포먼스로 런웨이를 더욱 향기롭고 촉촉하게 만들기도 했어요. 디자이너 수잔 팡은 피날레 이후 직접 걸어 나와 장미잎을 공중에 흩뿌리는 인사를 전하며 이 장밋빛 런웨이의 마지막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한 동화책에서 영감을 받은 수잔 팡은 이번 시즌 처음으로 아동복을 선보이며, 러블리하고 동화적인 의상을 통해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