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맹을 성공적인 행보로 이끌고 있는 피에르 발맹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발맹 걸’ ‘발맹 효과’라는 단어에 익숙해졌지만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이 역사적인 발맹 메종을 부활케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발맹을 성공적인 행보로 이끌고 있는 그와 ‘엘르’가 나눈 이야기. ::피에르 발맹,여성스러운,화려한,우아한,유진,파티,행사,축제,스페셜장소,연말,크리스마스,모임,기념일,패션쿠튀르,엘르,엣진, elle.co.kr:: | ::피에르 발맹,여성스러운,화려한,우아한,유진

피에르 발맹은 자서전 에서 “파리에서 옷을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여성이라면 발맹 옷은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불과 몇년 전에 이 문구를 봤더라면 수긍하기 힘들었겠지만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을 만나 봉긋 솟아 오른 지금의 발맹은 파워 숄더 재킷의 어깨높이만큼 모두를 열광케 하고 있다. 피에르 발맹의 말이 딱 들어맞는 때다. 화려한 체인 장식, 높이 솟은 어깨의 블레이저 재킷과 발맹의 로고가 크리스털로 장식된 데님 팬츠는 발맹의 또 다른 상징이 됐다. 역사 속에 조용히 사라져갈수도 있었던 발맹을 몇 시즌만에 성공적으로 부활시킨 장본인인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은 올해 44세로 피에르 발맹과 같은 프랑스 북쪽의 추운 마을 르 쿠테(Le Touquet)에서 태어났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7세가 되던 해에 파리 에스모드에 입학해 졸업하자마자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파코 라반 프레타포르테 책임자에서 아포스트로( Apostrophe)라는 스타일 사무실을 거치며 패션 경력을 쌓았다.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그와의 인터뷰는 과거 피에르 발맹이 아파트였던 그의 아틀리에에서 이뤄졌다. 각진 얼굴, 짙은 눈썹, 가위로 대충 자른 듯한 헤어 스타일에 구겨진 청바지, 낡은 스니커즈를 신은 그는 잘 정돈된 아틀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아틀리에의 분위기 신전 같은 모습이다. 그가 디자인한 옷처럼 섹시하고 강한 실루엣을 드러내는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과거에 에바 가드너와 캐서린 헵번이 피에르 발맹을 찾았으며, 이제는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을 찾는 케이트 모스, 다이앤 크루거, 샬롯 갱스부르가 오는 곳으로 변했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틀리에 벽에는 피에르 발맹을 떠올리게 하는 스케치들도 걸려 있었다. “모든 게 예전 그대로다. 내 물건은 하나도 들여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조각과 석고상, 카펫들은 1982년 피에르 발맹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후계자였던 에릭 모텐슨, 앤드루 쥐엔, 지르 듀르프, 오스카 드 렌타가 그의 가르침대로 공유하고 교류했던 흔적들로 채워져 있다. 그의 물건은 아이팟이 전부다.“처음 발맹을 맡았을 때 피에르 발맹의 향수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패션에 대해선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 한마디로 애매모호했다. 발맹이 무도회 의상으로 유명했던 것만 알았을 뿐이다. 아틀리에에 있는 과거 문서들이 많은 도움이 됐다. 그가 작업했던 방식, 컬렉션들을 끊임없이 살펴봤다. 지금의 발맹 컬렉션 역시 그때처럼 밤이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계절별로 작업을 시작할 때도 이브닝 의상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도 그래서다.” 피에르 발맹의 자취가 그대로인 아틀리에 모습처럼 데카르넹은 피에르 발맹이 추구했던 것들을 하나도 잃지 않으려 한다. 피에르 발맹의 시간피에르 발맹은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의상 매장을 오픈한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일찍이 건축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간 그는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터득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몰리뉘(Molyneux) 쇼를 시작으로 패션계에 몸담게 된 그는 이후 루시앙 루옹(Lucien Lelong)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크리스챤 디올을 만나게 된다. 크리스챤 디올과 피에르 발맹은 막역한 사이로 함께 아틀리에를 오픈할 계획을 세웠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전쟁 후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을 구해 코트를 완성했고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 그의 첫 고객이었다. “발맹이 살았던 시대는 억압적이었다. 그의 어머니를 만난 게 1939년이고 그때 군대에서 내 책을 읽으며 복무하고 있는 아들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짧은 메시지를 하나 남겨줄 수 있냐고 묻기에 흔쾌히 응했다. 그가 안전하게 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후 그를 만났다.” 1945년 발맹이 첫 데뷔를 했을 때 그녀가 남긴 글이다. 그후 발맹은 메종을 오픈했고 캐롤 베이커, 태국 왕비 서킷 등 할리우드 여배우와 여러 나라 공주들이 그의 고객이 됐다. 또 캐서린 헵번, 줄리엣 그레코, 브리짓 바르도가 영국 여왕과의 만남 자리에서 발맹의 의상을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옷은 정교한 자수와 화려한 장식에 피스타치오 빛의 초록, 상아색 같은 옅은 컬러를 사용해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을 지향했기 때문이었다.1 1960년 겨울 컬렉션에서의 피에르 발맹과 모델2 1950년대에 선보인 이브닝 드레스. 데카르넹식의 쿠튀르 피에르 발맹이 살았던 시대는 가고 데카르넹이 이끄는 발맹은 분명 젊고 파워풀해졌다. ‘발맹 걸’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하지만 이름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뀐것은 아니다. 그는 피에르 발맹의 자취를 여전히 따르고 있다. 부풀린 어깨와작업 방식은 과거의 발맹처럼 이 우아하고 정교하다. 그의 컬렉션을 보면 마치 그가 ‘발맹 걸’처럼 활동적이고 파티 광일 것 같지만 그는 사람이 너무 많은 장소도, 시끄러운 소음도, 밖에 나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를 볼 수 있는 가장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장소는 록 콘서트 장소 정도다(피에르 발맹 역시 스칼라 극장을 자주 찾았다). “소란스러운 장소에 가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음악을 좋아한다. 아이팟도 셔플 모드로 해 전혀 다른 장르의 음악을 섞어 듣는다. 음악이 가장 큰 영감이 된다.” 그는 쇼 음악도 여러 장르를 믹스한다. 조지 마이클에서 마이클 잭슨으로 또 큐어의 음악으로.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쇼가 임박하기 직전에 음악을 바꾸기도 한다. 사람들의 평가에 유동적으로 반응하고 첫인상으로 정해진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한다.”진짜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야생이라고 대답한다. 자연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 그는 그런 와일드함을 디자인으로 표현해낸다. 하지만 옷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만큼은 그 무엇보다 확고한 고집이 있다. 피에르 발맹이 그러했듯이. “요즘도 피에르 발맹이 만들었던 재킷을 뜯어보고 어떻게 바느질했는지를 본다. 바느질 공부를 위해서다. 아무리 정교한 옷이라도 입었을 때 티셔츠처럼 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아틀리에와 직접 연락하며 작업한다. 정확한 방법을 모를 때는 일단 소재를 정하고 스케치를 한다. 기술적인 것에 제한받지 않고 원하는 스타일을 정확히 보여주고 싶을 때는 직접 바느질도 한다. 완벽한 착용감을 위해서 여러 번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발맹의 성공 요인이며, 그의 의상에 천정부지에 달하는 값이 매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디자인에 있어서 추구하는 것은 현재에 존재하는 여성들이다. 특별히 암시하는 내용을 담지 않고 몸과의 물리적인 관계를 따져 매우 기초적인 것들에 충실하려 한다. 그렇다고 형식적인 것보다 본능에 충실한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디자인한 옷을 공장에 보내고 답을 기다리는 방식이 싫다. 난 ‘메종’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크리에이터라는 단어 역시 너무 잘난 척하는 말 같다. 난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저 옷을 만들 뿐이다. 새로운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쁜 옷들을 조화시켜야 하고 옷을 만들 때는 스타일과 스타일링이 모두가 조합돼야 한다. 그것이 또 다른 패션의 본질이다.” 더불어 그는 피에르 발맹 시대의 매력적인 여성을 뜻하던 단어였던 ‘Jolie Madame’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2010년의 발맹을 입는 여성은 옷장에 청바지와 티셔츠, 하이힐 그리고 짧은 옷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3 당대 최고의 여배우, 왕비들이 피에르 발맹을 찾았다.4 피에르 발맹이 디자인한 오버 숄더 코트.5 1950년대의 발맹 컬렉션.*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