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사랑한 소년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에쿠우스’가 다시 돌아왔다. 역대 최고의 알런으로 손꼽히는 송승환과 조재현이 이제 중년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에 도전하고, 검증된 스타 정태우와 류덕환이 알런으로 태어나 말들에게 경의를 바친다. 로데오 경기에 출전하는 카우보이에게만 말들을 사랑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말에 끌리는 건 본능이다.::연극열전3, 에쿠우스, 조재현, 송승환, 정태우, 류덕환, 피터 쉐퍼, 문화공간 이다, 동숭아트센터, 엘르, elle.co.kr, 엣진:: | ::연극열전3,에쿠우스,조재현,송승환,정태우

“이건 내가 아니라 우리 딸이 봤어야 했는데…”1막이 끝났고, 잠깐의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어느 중년 관객이 옆에 앉은 지인에게 하는 말이 슬며시 들려왔다. 말로 나온 연기자들의 몸이 너무 좋아서 공연을 딸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자고로 젊은 남자들의 후끈한 열기를 흡수하는 건 순전히 언니들의 몫이 맞다. “히이이잉” 소리치며 탄력 있는 근육을 자랑하는 이 짐승남들을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게다가 빤스(!)만 입고 나오는 귀여운 알란이라면 더욱 놓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 이 연극은 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다! 이 난해한 연극에서 이런 원초적인 반응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대개는 “이게 무슨 이야기냐?”하며 난색을 표하기 마련이다. 대학의 연극 동아리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 단골 연극은 20대 남자 연기자라면 누구나 관문처럼 지나가야 하는 통과의례 중에 하나다. 피터 쉐퍼의 는 연극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레퍼토리다. 1973년 영국 초연 이후, 매 공연마다 누드와 섹스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2008년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도 영화 시리즈의 주인공 다니얼 래드클리프가 알몸으로 등장하면서 인기몰이를 한 적이 있다. 이제 막 연극을 시작한 초짜 연기자들과 인터뷰하면 의 알란 역이 욕심난다는 얘기를 꼭 듣게 된다. “또 에쿠우스야!”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35년이 넘은 이 연극이 여전히 무대에 오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월의 흔적을 피해간 것처럼 항상 신선하기 때문이다. 아니, 는 새로울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갖고 태어났다. flashObject2('winTop','/elle/svc/elle_admin/etc/Sub_Video_Player.swf', '100%', '320', 'flvpath=rtmp://movie.atzine.com/vod/REPOSITORY/2010/01/04/MOV/SRC/01AST022010010435005010975.FLV',','transparent'); 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을 보인 는 조재현이 연출을 맡으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는 를 성공리에 이끈 프로듀서이자 얼굴마담이었고, 내친김에 연출과 주연까지 도전하는 야심을 선보였다. 조재현은 이미 1991년과 2004년에 알런 역을 연기하면서 스타 배우로 올라섰다. 알런 역에 송승환(1981년), 최재성(1985년), 최민식(1990년)이 거쳐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는 분명 국내 연극계를 대표하는 스타 제조기였다. 이번 공연에 알런 역에 정태우와 류덕환이 합류하면서 그 신화의 바톤을 이어가고 있다. 언뜻 보면 이 공연은 원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찌른 열입곱 살 알런을 치료하면서, 부모의 왜곡된 사랑과 사회적 억압에 짓눌린 소년의 내면과 무의식을 엿보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새 말에 대한 열망(원시적 욕망)으로 가득 찬 소년을 동경하게 된다. 조재현의 는 이 과정을 비교적 명료하게 제시한다. 그가 제작발표회에서 “이 연극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것처럼 말이다. 그의 는 다소 단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부모와 아들 알런과의 관계를 단선적으로 묘사한다. 누구나 알런의 폭발과 분출이 외부의 억압에 의해서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알런 캐릭터의 독특한 매력은 성인들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들이 파악할 수 없는 어린왕자와도 같다(이미 청소년기를 거친 어른들은 모두 이 시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다이사트조차 그 소년에게 다가설 수 없는 지점, 즉 서로 간극과 균열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틈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반면 다이사트 연기는 청춘의 꽃 알런보다 훨씬 눈부시다. 노련한 베테랑 연기자들이 다이사트를 연기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젊은 시절 알런을 거친 연기자들이 다이사트를 연기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조재현과 함께 다이사트를 연기하는 송승환은 “다이사트는 어시스트를 하고, 골은 알런이 넣는다”고 말하지만, 이번 는 그 어느 무대와 달리 중년의 다이사트에 더 마음을 빼앗겼다. 이들의 노련한 패스는 공격수 알런이 골을 편하게 주워 먹게 만든다. 진짜 알런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관객과 연출자가 아니라, 알런을 연기해 본 베테랑 배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건 분명 다이사트를 연기하는 송승환과 조재현의 무대다.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한 소년의 개성과 열정을 빼앗는 행위가 얼마나 잔혹한 짓인지, 사회와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중년만이 그 병폐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후반부에 이르면 루치노 비스콘티의 처럼 다이사트의 청춘에 대한 회한과 동경이 무대를 감싸고 있다. 극 전체로 본다면, 알란과 다이사트의 관계를 통해서 동성애나 인간/비인간, 정상/비정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감성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열망의 상실 정도로 이 비극은 정리된다. 알런과 다이사트의 의식과 파괴성을 읽는 다양한 코드가 존재하지만, 조재현의 연극은 그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 그 한계를 넘는 방법은 철저하게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난해하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에 너무 쉽게 동질감을 느낀다면 이 역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로는 어렵고 모호하게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그 본질에 충실히 다가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는 늘 전략적인 포석이 있었다. 그건 이번도 마찬가지다. 이 연극을 꼭 두 번 봐야 하나의 실체로 완성된다는 점이다. 한번은 알런의 시선으로, 또 한번은 다이사트의 시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