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한 화이트 셔츠와 블랙 미니드레스, 테일러링이 훌륭한 재킷 등 기본적이고 클래식한 ‘에센셜 아이템’이 지닌 힘은 특별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 사이에서 견고하게 중심을 지키며 손쉽게 근사한 스타일을 완성해 주는 건 물론, 만듦새가 뛰어난 에센셜 아이템일수록 매일 입어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깊은 멋을 발하니까. 계절의 꽃처럼 빠르게 피었다 사라지는 ‘트렌드’야말로 최신 트렌드를 다루는 패션지에서 매일 먹는 쌀밥처럼 익숙한 에센셜 아이템의 존재감은 왠지 미비했던 것이 사실. 특히 남녀 불문 모두의 옷장에 하나씩 있을 법한 화이트 탱크톱이야말로 매우 흔하고 평범해서 쉽게 지나쳤지만 이 흔하디흔한 ‘나시티’가 맹렬한 기세로 런웨이를 장악하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을 이끌고 있다.
돌돌 말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얇고 가벼운 부피, 아무렇게나 입을수록 멋스러운 특유의 편안함과 쾌청한 화이트 탱크톱에 대해 얘기하자면 먼저 그 히스토리를 살펴봐야 한다. 흥미롭게도 탱크톱은 오직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옷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적인’ 옷이었다. 1910년대, 셔츠를 입고 바캉스를 즐기던 남성들의 언더웨어로 탄생한 탱크톱은 후에 20~40년대 세계대전 기간에 비로소 ‘옷’으로 인정받았고, 제임스 딘과 말런 브랜도 등 아이코닉한 배우들이 즐겨 입으며 그 시절을 풍미한 마초적 남성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아내에게 무분별한 폭력을 휘둘러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일부 남성들이 모두 이 옷을 입고 있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통해 화이트 탱크톱은 ‘Wife Beater’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이처럼 오랜 시간 마초 맨들의 전유물이었던 화이트 탱크톱이 여자들의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한 계기는 미니멀리즘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1990년대. 캘빈 클라인과 질 샌더의 극단적으로 간결한 미니멀 룩 사이에서 빛을 발하며 자유로운 스타일링을 가능케 했던 일등공신이 바로 화이트 탱크톱이었으니! 흰 탱크 톱과 미디스커트의 완벽한 매치를 보여준 케이트 모스의 캘빈 클라인 런웨이 룩은 지금도 ‘레전드’로 회자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제는 트렌드라고 말하기도 입 아픈 1990년대와 Y2K 트렌드의 영향력이 건재한 요즘, 어쩌면 화이트 탱크톱의 귀환은 당연한 수순 아닐까?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유행을 그대로 즐겨 입는 MZ세대 아이콘들의 리얼 웨이 룩에도 빠지지 않는 아이템 역시 화이트 탱크톱. 마침 이번 시즌과 다가오는 새 계절, 심플한 화이트 탱크톱에 매료된 디자이너들의 행보가 돋보인다. 한가운데 자그마한 로고를 장식해 단정하면서도 클래식한 멋을 풍기는 이번 시즌 로에베의 탱크톱은 시작에 불과했다. ‘#뉴뉴보테가’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화려하게 데뷔한 마티유 블라지의 데뷔 쇼에서 모두의 눈을 사로잡은 룩은 바로 깨끗한 흰색 탱크톱과 누벅 소재 데님 팬츠 착장. 과장된 기교나 별다른 장식 없이도 그 자체로 존재감이 뚜렷한 룩을 필두로 고급스러운 가죽 팬츠, 미디스커트와 매치한 탱크톱 스타일은 하우스를 이끌 새로운 디자이너의 역량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한편 라프 시몬스와 미우치아 프라다 또한 보디라인을 드러내는 단정한 화이트 탱크톱을 컬렉션 전면에 내세우며 탱크톱에 노골적인 러브 콜을 보냈다. 아이코닉한 삼각 로고 장식을 사뿐히 얹은 화이트 탱크톱과 어울린 다채로운 미디스커트 룩이 카이아 거버, 헌터 샤퍼를 비롯한 총 일곱 명의 모델과 연이어 선보였으니 그야말로 새 시즌을 풍미할 ‘키 아이템’의 등장! 프라다 쇼가 막을 내린 후, 많은 이가 올해는 꼭 쭉 뻗은 팔뚝을 만들어 탱크톱을 사겠다며 입을 모았다. 여기에 부드럽고 우아한 무드를 적절히 가미한 끌로에와 아크네 스튜디오의 런웨이도 화이트 탱크톱의 재발견이라 할 만했다. 이처럼 돌고 돌아 다시 ‘기본’으로 회귀한 디자이너들의 반가운 탱크톱 사랑이 곳곳에서 포착되는 지금, 에디터 역시 옷장 깊숙이 넣어둔 탱크톱들을 꺼내 어떤 서머 스타일링을 즐길지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다. 물론 케이트 모스처럼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고 근사한 스타일을 완성할 탄탄한 팔뚝 라인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운동부터 시작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