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성폭력방지법과 가정폭력방지법을 내놓고, 장관도 시켜주고. ‘남녀 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도 내놓고. 그래서 여자들이 대한민국의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보살핌을 받게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꽃다방 김양’ ‘미스 김, 커피!’ ‘아줌마들이란…’ ‘사모님과 함께 춤을’ 등 호칭 문제는 어떤가. 대한민국에 과연 여자들을 존중하는 호칭이 있을까. 호칭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확정 짓는다.”
‘남녀 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발표됐다. 더 이상 여직원을 ‘미스 김’으로 부를 수 없게 되고 ‘부모 성 함께 쓰기’ 움직임도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1999년. 〈엘르〉는 ‘미스 김’뿐 아니라 ‘~양’ ‘아줌마’ ‘여사님’ ‘사모님’ 등 여성 호칭이 품은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법이 어떻게 바뀌든, 호칭을 비롯한 여성이 겪는 일상의 우여곡절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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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적으로 수상한 경향 1999. 12
“최근 히트를 거둔 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자유연애의 깃발을 휘날리며 섹스를 당당하게 즐겼는데, 그녀는 전문직 여성의 전형이었다. 한쪽에선 페미니즘의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들떴는데, 과연 이는 페미니즘적으로 아름다운 시절을 그려내고 있을까. 히트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들여다보자. 자유연애주의자인 전문직 여성은 아기를 갖게 되자 남자에게 집착하는 악역이 된다. 자유연애주의자였던 남자 주인공은 바람기를 마감하고 순결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무늬만 페미니즘인지 진위를 밝힐 틈도 없이 대중 매체 속의 페미니즘은 붐을 일으키고 있다.”
드라마의 그녀들이 공개적으로 섹스를 나누기 시작한 시절. 페미니즘적 변화의 액션을 취하던 미디어에서 수상한 점들을 탐지했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는 캐치프레이즈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라고 반문하기도 하면서. “어떤 페미니스트는 사랑에 말려들면 페미니즘적 행동지침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며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한 페미니스트가 보냈던 연애편지는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며 ‘사랑에 투항한 페미니스트’라는 떠들썩한 수군거림을 들었다. 일본에서 스타덤을 누리고 있는 젊은 여성 소설가는 미혼인 채로 아기를 낳겠다고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그녀가 스타급 소설가가 아닌 평범한 여자였다면 아기를 가졌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잠적해야 했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신세기적 화두가 생긴 사랑 앞에 여자들은 어떤 행동지침을 갖춰야 할까.”
사랑에 적극적인 여자가 가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 〈엘르〉는 궁금했다. 페미니즘이라는 화두 앞에 평등한 사랑을 나누기 위한 연애의 전제조건은 무엇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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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여자들이 얻은 것과 잃은 것 2001. 8
“오빠들에게 나만 바라보라며 다부지게 외치는 시대. 언뜻 보면 여인천하가 전개된 듯하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몸에 달라붙는 치마를 입었다고 주위 어른들로부터 호되게 얻어맞은 한 젊은 여성이 자살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힌두교 여성에게 베일로 몸을 꼭꼭 가리고 다니라며 윽박지르고 있다. 가부장 중심의 낡은 전통을 고집하는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살고 있는 여성 모두가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다.”
〈섹스 앤 더 시티〉와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등장한 지도 꽤 시간이 흐른 2000년대 초반. 가나에는 아직도 노예로 살아가는 처녀들이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서로 다르게 펼쳐지던 여자들의 일생. 여전히 씁쓸한 진실과 그럼에도 계속되는 진보를 동시에 이야기했다. “부부재산계약제도의 역사는 40년이 넘었지만 실제 계약서를 등기한 것은 지난 5월의 한 커플이 처음. 이 제도가 이혼을 쉽게 만들지 않겠냐는 의혹도 있지만, 잘 살던 사람이 재산 때문에 이혼을 감행하거나 재산 가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이혼하려고 맘먹은 사람이 그냥 눌러살지는 의문이다. 그보다 공동명의라고 세금을 더 내는 것도 아닌데, 남편 명의의 집이 76%에 달하는 현실을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 평등한 결혼생활은 경제권의 평등에서 시작된다. 운명의 상대라고 믿고 있는 그에게 살짝 물어보자. 부부재산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서명할 때만은 눈꺼풀 위의 콩깍지를 벗겨낼 것.”
2001년 5월. 한국에서 최초의 부부재산계약서를 등기한 커플이 등장했다. 〈엘르〉는 생각했다. ‘결혼만 하면 공주처럼 살게 해줄게’라는 도박 같은 한 마디보다 부부재산계약제를 믿는 게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현명하고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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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스페이스와 섹스의 엉뚱한 만남 2001. 9
“여성부와 페미니스트들이 사이버 성폭력에 맞서려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것만 봐도 테크놀로지가 얼마나 쉽게 악용되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지난 세기말에 경찰이 사이버 성폭력과 전쟁을 하겠다며 야심만만하게 선전포고를 했지만, 갈수록 사이버 성폭력 범죄는 늘어나고 있다. 컴퓨터 통신을 하는 여성 가운데 85%가 성폭력에 시달렸다니, 이제 가만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제 남자들의 뻔뻔스러운 성폭력은 온오프라인에서 동시 상영되고 있다.”
익명의 ID 뒤에 숨은 남자들이 온라인에서 저지르는 난폭하고 변태적인 사건사고, 그 잘못된 욕망에 가한 일격. 온오프라인에서 동시 상영돼 온 성폭력 문제는 테크놀로지의 무한 발달과 함께 더욱 거대해졌고 , 결국 ‘N번방 사태’라는 비극적인 괴물까지 탄생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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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우먼이 개인주의자가 된 이유 2002. 5
“48세의 비서관인 프랑스의 크리스티안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 업무를 시간제로 하기로 상사와 합의했다. 상사는 그녀가 시간제로 일하겠다고 했을 때 편한 대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직업을 가진다는 자부심이 서서히 그 가치를 잃고 있는 건 아닐까? 직장에서의 성취는 인생 최고 목표에서 밀려난 것 아닐까? 물론이다. 사람들은 직업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
공무원들의 주 5일 근무제, 학교 수업의 주 5일제가 실시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 일밖에 모르던 커리어 우먼들은 회사에 대한 태도를 확실하게 전환했다. 야근으로 애사심을 과시하는 건 구시대적 태도가 됐다. 시간제로 일하겠다는 직원에게 편한 대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상사의 예시는 20년이 흐른 지금의 근로자에게도 부러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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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른 섹시 코드 분석 2002. 7
“글래머러스하다 혹은 매력적이라는 말로 대치되는 최고의 찬사, ‘섹시하다’는 말은 시대를 따라 진보와 변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그러니 섹시하고 싶은 현대 여성들이여, 자신의 몸부터 당당히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지금도 세상 어딘가엔 당신이 가장 섹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불과 5년 안에 당신의 몸매가 세상의 표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별로 완벽한 몸매라 일컬어졌던 마릴린 먼로, 트위기, 크리스티 브링클리, 신디 크로퍼드, 케이트 모스, 지젤 번천의 리얼 사이즈를 공개하며 볼륨감, 섹시미, 황금비율의 기준이 얼마나 주관적이며 변화무쌍한지 분석했다. ‘섹시 코드’ 역시 트렌드를 대표하는 ‘룩’처럼 문화와 유행의 지배를 받는 것일 뿐. 자신의 몸부터 당당히 사랑하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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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을 오르는 커리어 우먼 2003. 5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농담이 왠지 그 자체로 억울하다. 결국 커리어 우먼의 승진의 한계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까지’가 아닐까. 남자나 선배나 혹은 남자 선배보다 낮은 곳으로 임하고, 그들을 좌지우지할 권력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 아아, 불쑥불쑥 솟아나는 수많은 파격이 오만하게 도사린 이 유리 천장을 깨버렸으면!”
여성 검사의 임관 숫자가 늘어나고 남자만 입교하던 사관학교에도 여학생 신입생이 생겼고, 여성 CEO도 심심찮게 눈에 띄던 때. 〈엘르〉는 여성들이 유리 천장을 뚫고 새로운 영역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치는 것이 ‘성공’보다 ‘파격’처럼 여겨지는 것에 탄식했다. 18년 전 칼럼에서 짚어낸 이 한계는 지금도 유효하다. 세상은 한편으로 아주 느리게 변한다. “여자들이 활개 치는 상황에 남자들이 몹시 당황하고 있다. 아니, 그녀들로 인해 머리끝까지 도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다. 그렇게도 용감했던 마초들이 이제 스트레스 받아 못살겠다고 징징댄다. 못 믿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자유분방하며, 트렌드에 극도로 민감한 프랑스 남자들이 직접 얘기했다. 지구상에서 남자로 살아가는 것이 끔찍한 악몽이라고! 20년, 아니 10년 후면 우리나라 남자들 입에서도 이런 얘기가 쏟아질지도 모를 일.”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여자들은 연애할 때도 남자를 ‘옵션’ 취급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진보 커뮤니케이션 센터 ‘CCA’가 다양한 나이대의 남자 88명에게 얻어낸 흥미로운 결과. ‘이 시대의 남자로 산다는 건 아주 끔찍한 악몽’이라는 그들의 결론을 서울에 사는 남자 28명에게 들려주며 작은 인터뷰를 진행해 놀랄 만큼 공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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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각, 당신의 자궁, 당신의 생리대 2004. 4
“‘보송보송’을 외치는 (생리대 CF 속) 청순녀의 속내에는 액체를 젤리로 만드는 초강력 흡수제 ‘폴리머’가 있었고, “깨끗해요” 한 마디를 위해 형광표백제가 동원됐다. 삽입식 생리대인 탐폰에는 말로만 듣던 다이옥신이 들어 있다. 탐폰 제조사와 식품의약청이 무지를 과시하는 동안 자궁내막증과 피부병, 독성쇼크증후군으로 인한 쇼크사 등 지난 20년간 꾸준히 증가한 생식기 질병이 1회용 생리대의 화학물질 때문이라는 혐의까지 제기됐다. 그리도 가렵고 붓고 비린내를 풍기던 생리의 온갖 악행이 바로 이 1회용 생리대의 짓이라니!”
2004년의 여성들, 아니 한 달 평균 21개의 생리대를 소비하는 지금의 여성에게도 해당되는 문제. 생식기로 고스란히 스며드는 1회용 생리대 속 화학물질에 대한 우려와 함께 당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인 ‘면 생리대’를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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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음모와 미덕 2005. 4
“호주제 폐지가 확실시되던 지난 설날 즈음, 고향 집에 내려갔다가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다. ‘두고 봐라. 호주제 폐지되고 나면 결혼 안 하고 아이만 낳고 살겠다는 여자들도 많아질 거다. 틀림없이.’ 넌지시 미소 지으며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에는 ‘뭐, 꼭 남자한테 기대 살아야만 행복한 건 아니지 않니?’라고 씌어 있는 것 같았다. 한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게서 이런 말을 듣다니! 사실 법적 제도가 바뀌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건 아니다.”
2005년 3월, 호주제가 폐지됐다. 불과 16년 전의 일이라는 게 더 놀랍다. 대한민국에는 호주제 폐지를 두고 사람들이 저마다 내놓은 음모론이 번졌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동성동본끼리 결혼하는 일이 생긴다거나, 가족이 해체된다거나. 그 모든 구시대적 오해와 현상에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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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끈’ 논쟁, 현실인가 강박인가? 2005. 9
“브래지어를 하고 있어도 불편해하지 않고 아버지를 마주 보고 빙긋 웃을 수 있는 상황, 아버지가 부성적 표현으로 신체적 격려를 해준다 해도 움찔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왜 부재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런 상황이 부재하는데 왜 이런 광고를 만드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결국 제자리걸음 아닌가. 여자들이 브래지어를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이런 논란을 통해 남자들이 알게 돼 더 조심하고, 더 은밀해진다면 오히려 ‘부끄러운 브라끈’이라는 사회 통념은 더 강해진다.”
‘브라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내 정서에 일침을 날린다. 브래지어를 불편해하는 딸의 등을 두드려주며 “다 컸네” 하고 흐뭇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조명한 CF. 〈엘르〉는 이것이 ‘논쟁거리’가 된다는 사실에 의문을 던졌다. 브래지어 끈 그리고 브래지어는 왜 쉬쉬해야 할 문제일까. “지난 한 달간 인터넷에서 벌어진 여론 재판에 비하면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은 차라리 평화로운 편이었다. 인터넷은 지금 마녀사냥과 종교 전쟁, 힘의 질서가 통용되는 중세시대다.” 솔직하다는 이유로, 순진한 이상주의자라는 이유로, 자신과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익명 속 의사 표현의 창구로 급부상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여론 재판들. 군 가산점 문제와 탈레반에 납치된 기독교 봉사단체, 영화 〈디 워〉의 애국 마케팅까지. 2007년을 휩쓴 뜨거운 논쟁들을 마녀사냥과 종교 전쟁, 힘의 질서만이 통용되는 혼돈의 시기인 ‘중세시대’와 비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여자 스타가 섹스 어필한 건 별다른 이슈도 되지 않는다. 섹시해야 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다. 문제는 다시 여기서 시작된다. 섹시 최강자들이 모여 너도나도 ‘사랑해주세요!’라고 온몸으로 외치니 그 안에서 자연히 등수 매기기가 시작될 수밖에. 차별화만이 살길이다. 인기로 먹고 사는 프로인 그들은 어떻게 섹시해야 가장 잘 먹힐지 다양한 전략을 내세웠고, 그에 대한 반응도 예전과 사뭇 달랐다.”
‘섹시하다’는 표현이 무한한 동경을 담은 강력한 일상 언어가 됐던 2010년 초반. 〈엘르〉는 과거에는 감추는 것이 미덕이던 ‘섹시함’에 대한 욕망을 지금 여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지, 내면은 물론 패션과 매너, 심지어 성격까지 섹시해야 살아남는 이 시대가 정의하는 섹시함은 무엇인지, 그 표현이 지닌 미묘한 경계를 살펴보기도 했다. “요즘 서른은 서른이 아니고 스물 또한 스물이 아니다. 우리는 과학 기술의 진보와 함께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거품을 얻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걸 늦추고 산다. 사회 전체에 제 나이이길 거부하는 ‘안티에이징 현상’이 일어난다. 보톡스로 노화의 수명을 연장하는 게 더 이상 별다른 일이 아니듯 우리를 둘러싼 세상 모두가 방부제를 먹은 것처럼 정지하고 있다. 이전 세대에겐 당연하기만 했던 인생의 어떤 단계들이 현실과 접점을 이루는 시기가 점점 늦춰져가고 있다.”
50대 임원은 40대 부장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40대 부장은 30대 팀장을 크게 키울 생각이 별로 없고, 30년을 공부하고 준비하고도 사회 구성원으로 첫발을 내딛기 힘들어 ‘알바생’으로 분류된 청년들이 즐비하던 2010년. 나이 먹기를 거부하는 전 세대적이고 국가적인 세태를 꼬집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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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ABY, PEEKABOO! 2011. 5
“아이 1명이면 가계소득의 40%, 2명이면 55%, 3명이면 70%가 양육비로 들어간다. 문화생활, 노후 대비는 꿈같은 소리.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가사도우미 비용 등 육아 관련 비용이 서비스 물가 상승률 상위를 휩쓸었다’는 얘기에 한숨만 나온다. 당장 발에 떨어진 불은 영유아 보육비다. 낳자마자 예방접종을 해야 하는데 6개월까지 주사비로만 100만 원이 거뜬히 든다. 기본 접종, 선택 접종이 있지만 어떤 엄마가 기본만 맞히랴. 선택 접종은 1회에 10만 원이 넘는 것도 수두룩하고 보험도 안 된다.”
전 세계에서 본격적인 문젯거리가 되기 시작한 저출산. 나라별 출산율과 출산 장려 정책 등 다각도에서 이 문제를 조명했다. 양육의 기쁨이라는 감정까지 한데 녹여낸 글. 출산의 의미를 재고하고 더 나은 방향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려는 마음을 담았다. “〈천일의 약속〉은 비현실적으로 착한 여자 ‘노향기’의 등장으로 이슈화됐다. 남자의 마음이 이미 떠났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빙충’이면서 미련스럽게 그 사람을 옹호하고, 그런 자신이 좋다고 읊조리는 이 미지의 캐릭터는 ‘마조히스트’와 ‘에고이스트’라는 극단의 성격을 달린다. 작가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전제를 깔지 않았다면 정말 분개했을 강도다. 지금은 21세기이지 않나. 어떻게 쌓아 올린 여자의 지위인데 무지한 충성으로 세상 여자들을 강등시킨단 말인가.”
2012년의 인기 드라마 〈천일의 약속〉의 노향기라는 여성상에 의문을 던졌다. 순애보의 종결자라 하기엔 경험 부족이 확실하고, 착하다고 하기엔 자존감이 너무 센 그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며, 순종적이고 착한 여자에 관한 남성들의 여전한 시선, 그 시선에 사로잡힌 채 끌려다니는 여성들이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한다. “분리수거만 잘하면, 쓰레기로 아트를 하면, 에코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환경이 개선되리라는 건 위험한 환상이다. 일단 자연 상태에서 한 번 가공된 것은 무슨 짓을 하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환경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 대의명분과 편의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비 환경보호론자인 나도 요즘은 되도록 쇼핑을 자제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시골에서 풀만 뜯어먹고 살지 않는 한 식품 포장 쓰레기는 줄이기 힘들다. 언젠가부터 이게 아주 신경에 거슬린다.”
꼬박꼬박 돌아오는 ‘미니멀리즘’ 트렌드가 왜 쇼핑과 포장의 영역을 비껴가는가. 〈엘르〉는 ‘에코변태’를 자처하며 질문을 던졌다. ‘환경 개선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하고 있는 듯 보여도 여전히 멀었다’고 말하는 2012년식 ‘에코변태’의 외침은 지금 라이프스타일에도 곧장 날아와 꽂힌다. “세상의 많은 여자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복을 저당잡혔다. 희생은 늘 결혼한 여자의 몫이었다. 인구 고령화를 걱정해 인류의 개체 수 감소에 책임감을 느껴 때가 되어 하는 결혼, 낳을 수 있을 때 하는 출산 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살아남을 자구책을 강구하고, 보호하려는 까닭은 지금까지 자행돼 온 수많은 오류와 직결돼 있다. 싱글녀로 살아남기 위한 최종 방편은 경제에 기반한 노후 대책이지만 살아남으려는 가장 큰 이유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다. 나를 나만큼 사랑할 수 있는 이성이 나타난다면 언제든 이 여정을 끝낼 준비가 돼 있다.”
결혼에 목숨 걸지 않는, 21세기형 싱글 여성들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책임감에 혹은 신체 나이에 대한 압박감에 끌려가듯 이뤄지는 결혼과 출산은 ‘나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며, 이런 시각이 지금은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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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극으로침몰하지 않기 위해 2014. 6
“무엇보다 지금은 긍정적인 개선 작업이 절실하다. 친구이자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인 데이빗 필링은 세월호 참사 후 한국은 ‘존재론적인 절망’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존재론적 절망은 더 나은 미래의 상황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 안전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대목은 실생활에서도 꽤 광범위하다. 선박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기본적인 안전이나 근로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특히 공사 현장이나 도로의 위험성은 놀랄 만큼 높아 보인다. 기업과 개인 모의 안전의식이 충분치 못한 것으로 보일 때가 적지 않다.”
고통과 슬픔으로 잠식됐던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을 또다시 낳지 않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를 영국인 대니얼 튜더의 관점에서 살펴본 글이다. 어느덧 7년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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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하게 일하는 당신, 배드애스! 2016. 2
“우리는 더 이상 지나친 감성주의로 비난받을까 봐 북받치는 감정들을 무조건 억누를 필요가 없다. 온라인에서 회자되는 성적 학대나 희롱에 대해 일침을 가하거나 소소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인해질 수 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강인함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솔직한 것이다. 내 일을 하되 악성 댓글 따윈 무시하고 남자 동료들의 험담에는 귀 기울이지 말 것. 정당한 자기방어를 주장하고, 매일 용감하게 고개를 들어야 한다.”
‘파워풀’한 여성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까. 건강의 신호나 떠오르는 감정들을 묵인한 채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여성이 되려 노력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를 위해 ‘배드애스 우먼(유능한 여자)’이 돼야 하는 것일까. 여성상에 새로운 정의를 던지며 진정한 강인함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봤다. “현재 요리학과에 진학하는 성비는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실제로 레스토랑에 취직하거나 경력을 쌓아 높은 위치에 오른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낮다. 레스토랑에서는 그 이유로 여성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점을 들고, 이를 약한 체력과 감정적 성향 탓으로 단정 짓는다. ‘요즘 요리를 배우는 젊은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레스토랑을 자주 옮겨 다니며 다양한 주방과 셰프를 경험하는 거예요. 한 주방에 오래 있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비단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2018년에도 여전히 여성 셰프가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 건 시스템과 편견 때문이었다. 집 안에서 여성이 요리하는 행위와 정당한 직업인으로서의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숱한 차이가 존재함을 설명한다. 주방의 사정을 통해, 나아지지 않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 문제에 날을 세웠다. “걸 그룹 멤버들을 모아놓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관전하고 점수를 매긴 한 예능 프로그램은 파일럿 방송 후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포맷을 바꾸었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걸 그룹의 멤버가 먹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똑같다. 그렇다면 이것과 화사의 곱창 먹방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바로 외부 요소와 상관없이 오직 먹는 행위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방송에서 카메라의 존재나 음식을 만든 사람, 같이 먹는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여성을 본 적 있는가. 음식을 먹는 걸 그룹을 바라보는 관음적인 시선이나 젊은 여성에게 어울리는 혹은 어울리지 않는 음식에 대한 편견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곱창을 맛있게 먹는 화사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신선했다.”
‘잘 먹는 여성’ 에 대한 인식 변화를 짚었다. 이 흐름에는 외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거나 누군가와 미식의 기쁨을 나누는 여성 스타들의 존재가 한몫했음을 강조한다. “침대 위에서 남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건 반페미니즘적인 것일까? 에밀리 위트는 말한다. ‘섹스란 무엇이든 가능한 판타지의 영역이고, 합의된 규칙 안에서 누구든 지배하거나 복종할 수 있어요. 이런 섹스의 역동성을 즐긴다고 해서 현실에서 가부장제를 옹호한다고 느낄 필요는 없는 거죠.’ 자유롭고 억압되지 않은 섹스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키는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모던 섹스의 진정한 페미니스트적 전제는 여성이 침대에서 원하는 걸 정확히 요구하는 것이다.”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만큼 섹스의 개념과 형태도 급변한다. 우리가 바라는, 억압되지 않은 섹스란 대체 뭘까. 어떻게 요구하고 이뤄야 할까. 여성들이 어떤 경계 안에서 욕망에 충실하면 좋을지 살펴보며 〈엘르〉는 정확한 의사 표현과 상대와의 소통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동안 인류가 저지른 과오를 인정해야 할 순간에 비로소 직면했다.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겼기에 비윤리적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일들! 보다 많은 이와 함께 현실에 더욱 밀접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패션을 즐긴다면 아마 훨씬 아름다운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그러니 현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패션계의 용기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길. 패션의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이 적극적인 움직임은 이제 막 시작됐다.”
환경을 위한 패션계의 움직임이 거대하게 일어난 2019년. 동물 털과 가죽 사용 금지, 업사이클 소재 활용, 인종과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는 모델 기용 등 지속 가능한 공존을 위해 변화하는 패션계의 면면을 포착한 기사. 〈엘르〉 역시 2022년부터 시작할 '퍼 프리 정책’을 대대적으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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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ES K-POP KILL GIRLS? 2019. 6
“좋아하는 연예인의 열애설에 애인이 바람 피운 것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예전보다 석연치 않은 무대를 보면 성공 후 변한 친구를 볼 때처럼 씁쓸해진다. 그러나 이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보여준 ‘민낯’이 전례 없이 끔찍한 건 한쪽 성별(여성)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명예를 얻은 이들이 사생활에서는 여성을 상대로 성매매, 불법 동영상 촬영, 성폭행 등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 팬들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과연 사람이긴 했을까? ‘탈덕’을 선언한 유튜브 콘텐츠 속 증언들은 이 지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여자 연예인은 불법 동영상이 퍼질까 봐 무릎을 꿇는데, 남자 연예인들은 그걸 찍고 서로 돌려봤다니….”
‘버닝썬 게이트’로 대표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K팝 팬을 자처하던 이들에게 회의감을 선사했다. 이 산업 구조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의구심, 번쩍거리는 산업 저변에 눈 가리고 아웅 했던 아이돌 인권 문제들까지. K팝과 페미니스트 여성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품은 이들의 고민을 다뤘다. “쿨한 노년 여성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은 무엇일까? 그동안 우리 사회가 노인, 특히 노년 여성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는 삶의 연륜에서 오는 지혜, 인자함, 희생 같은 것에 가까웠다. 이 할머니들은 그런 빈곤한 상상력을 뛰어넘어 도전 정신과 유머, 감각, 전문성을 보여준다. 얼마 전 종영한 예능 프로그램 〈가시나들〉의 주인공은 늦게 한글 공부에 도전한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의 ‘짝꿍’인 20대 초반의 아이돌과 배우, 세대간 연결 역할을 하는 문소리 등도 등장하지만 이 기획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인생 만렙 할머니들의 새로운 도전 그 자체일 것이다.”
노년의 여성들이 콘텐츠를 통해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71세에 유튜버 박막례, 커플 룩으로 팔로어 80만 인플루언서가 된 60대의 폰 등. 노년 여성에 대한 조명을 SNS 창을 닫는 순간 끝낼 게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존재하는 세대와 시민으로서 공존하는 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짚었다. “폴리아모리를 단순히 양자간 연애의 대안으로 보거나,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한 자극적 선택지로 보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당연히 결혼 반론자 혹은 비혼주이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편견이다. 사회적 틀을 벗어난 관계에 있는 이들이 남보다 결혼 제도에 대한 의문을 품기 쉬운 건 맞다. 하지만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아모리스트 J의 생각은 심플하다. ‘우리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있다면 ‘와이 낫?’ 단지 아직은 가족을 꾸리고 싶은 큰 뜻이 없을 뿐이에요.’”
다자 연애, 오픈 릴레이션십까지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공존하는 세상. 〈엘르〉는 여전히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들에 주목했다. 이 관계에 깃든 진심은 무엇일지 이들은 사회적으로 ‘정형’이라고 여겨지는 관계의 형태와 사랑 방식, 제도 안에서 어떤 선택지로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 있을지를. “사실 인셀뿐 아니라 많은 남성이 섹스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여성이며, 여자들이 그로 인해 세상을 ‘편하게’ 산다고 여긴다. 이들에게 여성이 섹스할 때 느끼는 안전과 피임을 둘러싼 불안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펨셀은 불합리한 대우를 감수하면서까지 애정을 갈구하지 않기로 선언한 존재다. ‘비자발적’으로 관계를 포기한 것이 슬프거나 분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국 여성들의 비연애·비출산 선언은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일이 된 지 오래다. 왜 지금의 여성들은 여성혐오적인 성문화를 거부하고,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를 택한 걸까. 〈엘르〉는 북미에서 생겨난 신조어인 ‘펨셀(Femcel)’을 화두로 던지며 끝없이 낮아지는 출산율과 비혼 비율, 여전히 여성에게 혹독하게 가해지는 폭력과 범죄의 온상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어떤 물음을 던지고 있는지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