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부터 9월까지 런던에서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가족, 여자친구와 여행을 다니며 졸업 컬렉션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아직 시작 단계인 만큼 브랜드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몇 해 전에 TICV라는 프로젝트 브랜드를 세 시즌 정도 전개했는데, 브랜드 이름의 의미 때문에 디자인하는 매 순간 독창성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았다. 컬렉션을 구성할 때 자유롭게 다양한 방향성을 가져가고 싶어 단순하게 내 이름을 따 준태킴(Juntae Kim)이라고 지었다.
코르셋 장식을 더한 패딩 드레스를 직접 피팅한 모습.
젊은 디자이너들이 하우스 브랜드로 빠르게 흡수되는 시대다. 브랜드의 제안을 고민했던 적 있었나
마린 세르를 포함해 파리와 런던의 크고 작은 브랜드에서 남성복 디자이너 제안을 받았다. 당시 나는 디자이너로 파리에 가서 현장을 경험하는 것이 나을지, 영국에 남아 석사 과정을 마치고 브랜드를 시작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코로나19로 워킹 퍼미션이 취소되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브랜드를 론칭하게 됐다.
직접 피팅하는 디자이너는 종종 봐왔지만 모델처럼 직접 촬영하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카메라 앞에 서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컬렉션 준비 초기에 피스 중 몇 가지를 내 몸 위에 드레이핑해서 원형을 만들었는데, 협찬을 해보니 셀러브리티나 모델, 일반인 등 성별에 관계없이 내가 원했던 실루엣이 연출됐다. 물론 정식으로 브랜드를 시작하면 다양한 체형과 사이즈를 고려해야겠지만 지금은 내 몸 위에 원형을 만든 다음, 피스를 제작하고 피팅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최근 컬렉션에서 로코코·바로크 양식에서 영감받은 옷을 선보였다. 과거의 아이디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한국에서 여성복을 공부하며 서양과 동양의 드레스, 오트 쿠튀르 같은 과거 복식사의 요소를 접했다. 그리고 영국에선 남성복을 공부하며 기능성에 기반을 둔 패턴 커팅과 실루엣 개발에 대한 자료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남성복과 여성복, 과거와 현대의 상반되는 키워드 사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올랐고 그 요소들을 옷 위에 병치할 때 나타나는 새로움과 로맨티시즘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과거 의복의 디테일이나 실루엣은 원형 그대로 디자인에 적용하고 아트워크나 오브젝트 같은 요소들은 레이저 커팅, 3D 스크린 프린트 등 현대 기술을 활용해 재해석하려고 한다.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영감을 준 그림이나 인물, 아이템이 있다면
최근 컬렉션은 16~18세기 사이 유럽의 의복, 건축물, 초상화, 조각 같은 과거 요소에서 영감을 받았다. 특히 로코코나 바로크 시대 건축양식의 디테일과 실루엣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귀족들의 비스포크 코르셋, 드레스의 텍스타일, 자수 같은 요소들을 현대 의복의 실루엣 위에 다시 조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또 프랑수아 부셰, 파올로 베로네세 같은 당시 작가들이 그린 초상화나 페인팅에 나타나는 원근법, 단축법, 투시법 같은 회화법에 매력을 느껴 컬렉션에 녹여내기도 했다.
최근 리바이스가 진행한 업사이클링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Levi’s by Levi’s라는 업사이클링 프로젝트에 디자이너로 선정돼 반품되거나 버려진 501 제품을 활용해 디자인한 경험은 브랜드를 준비하면서 상업화와 지속 가능성을 고민했던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거나 잊힌 제품의 수명을 다시 연장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것이 또다시 버려지기까지 어떻게 하면 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기존 소비자들이 부담 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해 보길 바라며 501 재킷과 팬츠의 기본 실루엣을 최대한 보존하고, 그 위에 로맨틱 요소를 더하려고 노력했다.
준태킴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보고 싶은 브랜드 혹은 패션 아이템이 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나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에서 아카이빙 중인 전설적인 쿠튀르 드레스나 코르셋을 분해해 현대적인 실루엣으로 해석해 보고 싶다. 특히 샤넬의 이브닝드레스나 찰스 제임스,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디자이너들의 코르셋 피스는 지금의 브랜드에 많은 영향을 줬기 때문에 한 번쯤 재해석해 보고 싶은 브랜드다.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슈나 영감이 된 것은
사회 전반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종과 계급 차별, 친환경, LGBTQ 커뮤니티같이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회자되는 키워드들은 결국 패션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과감한 메시지를 표현하며 브랜드를 운영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다.
컬렉션을 구성할 때 젠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젠더를 고려하고 포용하는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그래서 단순히 여자가 입고 싶은 남성복 브랜드, 남자가 입고 싶은 여성복 브랜드라는 개념보다 성별을 수식하는 단어가 붙지 않는, 그냥 ‘브랜드’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면 좋을 것 같다.
특정한 인종, 성별 등을 고려하지 않고 디자인하는 만큼 내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준태킴이 내세우는 메시지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한국에서 내가 보고 자란 것들과 영국에서 경험 중인 상반되는 것들을 흥미롭게 조합한 컬렉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