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참맛! 불안에 나를 맡기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의상을 갈아입고 다음 신에 들어가기 전에 조용히 피우는 담배. 연신 들이키는 커피. 또박또박 발음하는 낮은 목소리. 똑바로 응시하는 눈. 배우 박해일의 모습이다. 그는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도, 삶에서도 달리고 달렸다::박해일,매종 마틴 마르지엘라,발맹 바이 퍼블리시드,릭 오웬스,벨 앤 누보,앤드뮐마스터,탕고드샤,엘르,elle.co.kr:: | ::박해일,매종 마틴 마르지엘라,발맹 바이 퍼블리시드,릭 오웬스,벨 앤 누보

“나란 사람이 늘 어딘가 내면이 불안하다. 어떤 풍파가 닥치든 완강하고 초연한 타입은 못 된다. 막상 오면 또 어떻게든 대처하는데 오기 전까진 굉장히 예민하고 불안해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 초연해진 건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론 불안이라는 게 한없이 개인적인 거니까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 것 같다.” 박해일은 덤덤하게 차분히 자신을 설명한다. 데뷔 이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필모그래피 뒤로 어쩌면 그는 늘 자신을 상대로 혹독한 스파링을 해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까다로울 것 같다는 막연한 거리감이 좁혀진 자리엔 진심으로 부딪치고 정직한 직구를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10년차 배우로서의 얼굴이 새로 보인다. 박해일은 10년 동안 15편의 장편영화와 3편의 단편영화를 찍었다. 때론 말간 얼굴의 소년이었고, 서늘한 사이코패스였고 능청스런 철부지였다. 가진 건 젊음과 패기뿐인 피 끓는 청춘이었다가 심장을 구하러 뛰어다니는 양아치도 돼봤다. 다이빙하듯 캐릭터로 빠져들었다가 나오기를 무한 반복하면서 수도 없이 가면을 썼다 벗었다. 그건 그가 가장 익숙하고 잘하는 일이었다. 이번엔 하나뿐인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험한 산과 들을 누비는 신궁이 됐다. 천하무적 최종병기 ‘활’을 들고 누비는 액션 히어로. 이제 막 영화에서 빠져 나온 그는 여전히 고집스런 얼굴로 “시원하다”고 말하면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벼락처럼 연애의 끝을 맞고 덩그러니 빈자리를 홀로 확인하는 사람처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어제부터 미음 말고는 못 먹는 상태라면서.아팠다 괜찮다를 반복한다. 어쨌든 한 영화와 6개월을 보낸다는 게 그런 일 같다. 영화 메이킹을 보니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될 정도던데.그때는 그랬지. 만날 말도 타고 산을 뛰어오르고. 말 그대로 철인 3종 경기를 하는 기분. 몸도 가뿐했다. 그런데 이거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나락이다. 김한민 감독님과는 을 함께한 이래 가볍게 술자리 하는 사인데 시나리오 하나를 말 그대로 읽어 보라며 건네주셨다. 흥미롭기도 하고 감독님의 색깔대로 풀어낼 수 있겠다 싶었지. 그런데 바뀐 시나리오를 새로 주시더니 그 다음엔 국궁 한 자루를 쥐어주시더라. 하하. 그래서 같이하게 됐다. 국궁을 직접 쥐었을 땐 마음이 복잡했겠다. 앞으로 벌어질 여러 가지 일들이 막 밀려오지 않던가.처음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남의 일 같았지. 조언도 잘 해주고. 하하. 그러다 막상 내 일이 되니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거다. 그렇긴 한데 자연인 박해일과 배우 박해일을 동시에 아는 감독님이 해보자니까 내가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겠구나, 도전해 보자 싶은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요즘 잘나가는 남자 투 톱 영화에 활이라는 새로운 소재도 충분히 경쟁력 있을 것 같다.병자호란이라는 시대적 배경 위에 말과 활, 조선인과 청나라 군사의 대결 구도로 이뤄지는데 지루할 틈 없도록 현대적인 템포로 풀어내거든. 활이라는 소재의 원시적인 쾌감을 극대화시키고. 동시에 ‘아, 그게 우리나라 활이었어?’ 같은 부분도 상기할 수 있고. 민족주의로 빠질 수 있는 부분은 배제하되 정통성에 대한 애착을 갖는 건 맞다고 본다. 역시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인 끌림은 캐릭터와의 궁합일까.직감이 좀 더 크다. 물론 직감이라는 게 개인적인 기질이나 취향, 스타일 같은 부분도 포함할 수 있지만. ‘신궁’이라니 언뜻 슈퍼 히어로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히어로 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접근방식은 전혀 다르다. 우린 그 함정에 빠지지 말고 현실에 발을 붙인 채 처럼 작은 캐릭터조차 날것 그대로 살리자고 이야기했다. 남이라는 캐릭터가 말을 타거나 활을 쏠 때 느낌은 한국영화에선 정도가 가깝다. 내게 활이라는 부분이 안성기 선배님의 오마주라면, 또 말이라는 부분은 정우성 선배의 오마주가 아닌가 싶다. 연기할 때 미리 움직임까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스타일인가?계산하기보단 일단 캐릭터에 젖은 상태에서 말과 행동, 감정들을 짚어가고 납득해 본다.영화 속 남이는 여동생을 지키려 활 한 자루 들고 10만 대군과 맞선다. 박해일도 그렇게 지켜 내고 싶은 게 있겠지.음. 아기일 수도 있고, 같이 사는 분일 수도 있을 텐데. 근데 내가 좀 이기적일지 몰라도 결국 그 답은 나인 것 같다. 결국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지금의 연기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단계인가?아직 자학의 단계를 넘지는 못했고 많이 보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를 더 사랑해야 될 거 같다. 그럼 나머지도 더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 요즘 연기가 재미있나?그렇지.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도 재미는 있었지만 그땐 항상 겁이 많았거든. 영화라는 장르의 낯설고 생소한 부분들을 하나씩 겪어보고 적응하는 시기가 있었다면 이젠 열심히 뛰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다. 사람들이 박해일에게 가장 오해하는 건?뭐, ‘싸가지’ 없을 거 같다? 약간 까다로울 거 같다는 느낌이긴 한데.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알고 보면 편한 사람이다. 나 같은 타입은 연기하려면 성격이 좋아야 한다니까. 근데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긴 하다. 주기적으로 자신만의 동굴이 필요한 스타일이군.사람들이 막 돌아다니는 곳에서도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그러기도 하고, 사람 진짜 많은 커피숍에서도 혼자 막을 칠 수 있는, 음악을 듣지 않아도 그런 게 가능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 불안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 방법을 강구한다는 게 다르다. 예전엔 뭔가 불안의 대상이 오면 나를 닫아버리곤 아, 어떻게 대하지? 어떻게 생각하지?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 왔어?’라고 받아들이는 거지. ‘뭐, 저 사람은 불안감이 없겠어? 같이 좀 좋은 쪽으로 즐겨 볼까?’ 하면서. 약간 변하긴 했다.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8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