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까맣게 잊고 지낸 세기말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계기는 놀랍게도 그 시대를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Z세대의 패션이었다. 이제는 Z세대의 유니폼처럼 자리 잡은 크롭트 톱의 유행을 보며 90년대 말 거리를 점령했던 배꼽티를 떠올렸고, 그들의 어깨 밑에 숨어 있는 작은 숄더백을 발견했을 때는 〈섹스 앤 더 시티〉 속 사라 제시카 파커의 바게트 백이 겹쳐 보였다. 바야흐로 Y2K 시대가 돌아왔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 Y2K를 강력한 패션 트렌드로 견인하는 주인공들은 올리비아 로드리고와 두아 리파, 벨라 하디드 같은 Z세대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셀러브리티들이다. 크롭트 톱은 물론 홀터넥 톱, 벨벳 트랙수트까지 이들이 유행시킨 아이템을 훑어보면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 니콜 리치 같은 ‘언니’들의 이름이 줄줄이 떠오른다. Y2K 트렌드의 인기는 숫자로도 증명된다. 소셜 미디어 틱톡에서 Y2Kfashion 해시태그는 1억6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고, 인스타그램에서 Y2K를 검색하면 224만 건이 넘는 게시물을 볼 수 있다. Z세대 사이에서 Y2K가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를 포착한 영민한 패션 브랜드들이 발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패리스 힐튼의 핑크색 트랙수트로 시대를 풍미한 쥬시꾸뛰르는 포에버21과 협업한 캡슐 컬렉션으로 성공을 거뒀고, 킴 카다시언의 언더웨어 브랜드 스킴스는 신축성 있는 벨벳 소재의 원 마일 웨어 컬렉션 ‘벨루아’를 론칭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했다. 추억 속 브랜드의 부활 소식도 들려왔다. 뒷모습만 봐도 브랜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데님 브랜드 트루릴리전이 4년 만에 국내 재론칭을 알리는가 하면, 1990년대 말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패션 브랜드 스톰 역시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 세기말 감성은 하이패션에도 스며들었다. 특히 블루마린의 2021 F/W 시즌 컬렉션은 그야말로 ‘그때 그 시절’의 화려한 귀환을 보는 듯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브로나노가 자신의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 등 당대의 히로인을 오마주한 런웨이 위에는 관능적인 레이스로 마무리한 크롭트 톱부터 큼직한 나비 장식이 달린 와이드 벨트, 풍성한 퍼 장식의 볼레로와 로 라이즈 진까지 당대를 주름잡은 ‘잇’템들이 모두 소환됐다.
그렇다면 Z세대가 Y2K 패션에 푹 빠진 이유는? 유력한 설은 빈티지 패션을 선호하는 Z세대가 세컨드 핸즈 숍을 통해 Y2K 시대 아이템을 접했고, 당시의 패션이 흥미를 끌었다는 주장이다. 미국 디지털 미디어 ‘리파이너리29’는 ‘코로나19로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소셜 미디어에 더욱 의존하게 된 Z세대가 대중문화가 번성했던 2000년대 초반을 발견하면서 당시의 청춘 문화와 패션에 신선함을 느끼는 현상’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Y2K 시절과 묘한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다. 범지구적 재난이라 불릴 만한 팬데믹이 장기화되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세계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 지금을 누군가는 디스토피아라고 명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타버스가 등장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젊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성공을 일구며 ‘유니콘 기업’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측면에서 우리는 새 시대의 출발점에 서 있기도 하다. 공포와 희망, 두려움과 기대가 혼재된 오늘날의 시대적 감성은 지구 종말과 뉴 밀레니엄의 희비가 뒤섞인 Y2K 시절과 닮아 있다. 혹시 Z세대는 Y2K 패션에 숨겨진 시대적 공감대를 본능적으로 읽어낸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