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파격선언! 고칠 수 없는 물건은 내 게 아니다? #엘르보이스

전구 갈기, 커튼봉 달기, 샤워기 헤드 갈기. 더이상 '사람 부르기'를 멈춘 어느 1인가구의 깨달음

BY이마루2021.10.12
내 집은 내가 고친다!  

처음 스스로 전구를 갈아보기 전까지는 모두가 ‘전구를 갈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딱 한 번만 직접 해보고 나면 ‘갈 줄 아는 쪽’의 성원이 될 수 있다. 내 경우 첫 실전은 자취방 형광등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방법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매우 간단했다. 단 한 번의 실전으로 나는 전등이 나가도 당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됐다.
 
음, 사실은 거짓말이다. 그 경험 이후에도 나는 수명 다한 전구를 눈으로 보기라도 하려면 어디를 어떻게 떼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매립등과 센서등의 벽에 부딪혔다. 2년 단위로 이사를 다닐 때는 켜지지 않는 현관등을 외면하고 얼마간 정신없이 지내다가 계약이 끝나면 이사를 갔지만,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인가? 내 집이 어떤 공간인지와 삶의 질이 밀접해질수록 집을 건사할 능력도 더 필요해진다.
 
하지만 필요를 의식하는 것과 별개로 한국에서 학생으로 산 16년 동안 나는 ‘주택 수리 교육 실전 편’ 같은 것은 접해보지 못했다. 찾아보니 올여름 서울시에서 모집한 집수리 아카데미는 최소 인원 미달로 폐강되었다고 한다. 1인가구의 무서운 증가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독립을 하고 세대주가 된다고 해서 집수리 교육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집을 관리하는 대부분의 역량은 필요에 떠밀려 일단 주먹구구로 해보면서 얻어진다. 내 경우 처음 월세를 벗어나 얻은 전세 투룸 빌라가 등을 떠밀었다. 봐줄 수 없는 벽지와 중고 냉장고를 페인트칠로 리폼하고, 주민센터에서 전동드릴을 빌려와 3m짜리 커튼봉을 혼자 달고 샤워기 교체와 시트지 시공까지 해치웠다. 하지만 셀프 ‘인테리어’와 ‘시공’ 사이에는 또 다른 절벽이 놓여 있다. 샤워기 헤드는 갈지만 수전은 손댈 수 없고, 전구는 바꿔도 벽등 설치에는 좌절했다. 문제가 생기면 “에휴, 사람 불러야겠네” 하고 전화기를 든다. ‘여기부터는 셀프로 불가능’하다고, 마치 넘을 수 없는 문턱이 놓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제품 수리서를 공유하고 수리 도구를 제작 · 판매하는 국제 커뮤니티 아이픽스잇(IFIXIT)의 ‘수리 선언문’에 따르면 ‘고치지 못하는 것은 가진 것이 아니다’. 조금만 고장 나도 스스로는 손쓸 도리가 없는 집과 차와 수많은 전자기기에 생활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사는 한 사람으로서 가난해지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내 물건을 내가 고쳐 쓸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무력한 빈곤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여성 주택수리 서비스 라이커스(LIKE-US)의 3회짜리 강좌를 어느 날 느닷없이 신청한 데는 그런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1강 수공구와 전동드릴 사용법, 2강 욕실 소모품 교체하기, 3강 전기 소모품 교체하기로 이루어진 이 수업의 참석자는 모두 젊은 여성이었고, 3회 수업 내내 참여율도 거의 100%에 가까웠다. 선생님도 물론 여성이었다. 수리 전문가에게 공구 사용 기초를 배우는 자리에 전원이 여성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거기 남자분이 좀 도와주시죠.” “힘쓰는 건 남자분이 하시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환경에서 2인 1조 실습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업의 모두와 함께 성실하게 수업에 임한 나는 3주 의 과정을 마친 뒤 의기양양하게 회사 동료에게 전동드릴을 빌렸다. 목표는 하나였다. 현관문에 이중 잠금장치 직접 달기.
 
결론적으로 잠금쇠 설치에는 성공했으나, 과정으로 말하자면 기껏 가르쳐준 선생님께 면목 없을 만큼 고전했다. 일단 뚫어야 하는 구멍 6개 중 첫 구멍을 뚫는 데 족히 15분은 걸렸고, 두 번째 구멍을 뚫는 과정에서 드릴비트가 부러졌다. 여기서 지치고 좌절한 나머지 보름쯤 그대로 방치했는데, 동료에게 드릴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관뒀을지도 모른다. 새 드릴비트를 사러 철물점에 갔다가 난생처음 듣는 용어들을 퉁명하게 쏟아내며 정확히 필요한 사이즈를 대라고 하는 가게 주인 때문에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 주세요”라고 한 것 같은 수모를 맛보기도 했다. 다행히 난관은 여기까지. 새 비트로 남은 다섯 구멍을 수월히 뚫어 이중 잠금장치 달린 현관문을 완성한 뒤 빌린 공구를 무사히 반납할 수 있었다.
 
그것 하나 설치하는 데 수업씩이나 들어야 하는가 묻는다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유튜브 동영상이나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너끈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해보니 어땠는가를 묻는다면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괜히 전문가가 있는 게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더 컸다. 수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전 교체 원리를 알아도 세면대 다리를 해체할 능력이 없다면 결국 전문가를 불러야 하고, 전등 교체 실습을 해봤다 한들 “기본 원리는 이렇지만 집마다 변수가 많다”는 가르침만이 선명하다. 그럼에도 수업 듣길 잘했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읽을 엄두도 나지 않는 러시아어 메뉴판처럼 보였던 집수리가, 그래도 영어 알파벳과 비슷하게 생겨 음절이라도 읽을 수 있는 스페인어 메뉴판 정도는 됐달까. 내게는 무척 유의미한 차이다.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의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LLE Voice’는 매달 여성이 바라본 세상을 여성의 목소리로 전하고자 합니다. 김초엽 작가, 뮤지션 김사월 등 각자의 명확한 시선을 가진 여성들의 글이 게재될 11월호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