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챔피언 람라 알리의 드라마틱한 인생사 || 엘르코리아 (ELLE KOREA)
CULTURE

복싱 챔피언 람라 알리의 드라마틱한 인생사

#소말리아난민출신 #모델을겸하는복싱챔피언 람라 알리가 지닌 이야기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류가영 BY 류가영 2021.10.10
레드 시폰 드레스와 화이트 삭스는 모두 Dior. 로즈골드 이어링, 옐로골드 링, 로즈골드 다이아몬드 링은 모두 Cartier.

레드 시폰 드레스와 화이트 삭스는 모두 Dior. 로즈골드 이어링, 옐로골드 링, 로즈골드 다이아몬드 링은 모두 Cartier.

웨스트 런던의 어느 시끌벅적한 체육관, 복싱 링 위의 람라 알리가 어쩐지 의기소침해 있다. “제 모습에 완전히 실망했어요. 마치 시합에서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항상 완벽한 페이스여야 하는데 말이죠.” 미국에서의 프로복싱 데뷔전을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떠났던 그가 영국으로 돌아온 지 겨우 5일째. 미국 복서 미카일라 네블과의 대결에서 거둔 승리로 알리는 무패 행진을 이어가게 됐다. “프로 시합은 이제 겨우 세 경기만 뛰었는걸요.” 그러자 멀찍이서 이야기를 엿듣던 동료 복서가 외쳤다. “어쨌든 넌 한 번도 진 적 없잖아.” 맞다. 알리는 처음부터 강했다. 2012년, 런던에서 가진 첫 시합에서 승리한 후 그의 아마추어 복싱 랭킹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2015 영국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더니 바로 다음해 그레이트 브리튼 내셔널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무슬림 출신의 영국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기록. 좋은 소식은 이어졌다. 2018년에는 나이키가 알리 스폰서를 자처했고, 세계적인 복싱 프로모션 회사 매치룸 스포츠와 계약한 다음 곧바로 미국 프로복싱 무대에 올랐다. 현역 최강 주먹으로 꼽히는 헤비급 챔피언 앤서니 조슈아와의 친분은 기분 좋은 덤. “필요한 건 없는지 가끔 안부 문자 하는 정도예요. 진짜로 뭔가 부탁해 본 적은 없지만 갑자기 전용기나 요트가 필요해지면 도움을 청해 보려고요.” 알리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조슈아의 말에 따르면 알리는 타고난 파이터다. 빛나는 잠재력을 갖췄음은 물론,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돌파할 줄 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링 위에서만은 아니다. 3년 전, 알리는 런던의 취약 계층 여성에세 무료로 호신술을 가르쳐주는 ‘시스터스 클럽’을 설립했다.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벗고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가정 폭력 피해자나 ‘싱글 맘’처럼 스포츠를 쉽게 접할 수 없는 모든 여성에게 열려 있다. 효과적인 펀치를 날리는 법, 골반을 올바르게 돌려 탄력과 파워를 주는 법 등 내 몸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기본 동작을 배울 수 있다. “혈기왕성한 남자들 사이에서 운동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여성을 위한 곳이기도 하죠.” 알리는 이 프로그램을 영국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블루종 재킷과 셔츠는 모두 Alexander McQueen. 골드 브레이슬렛, 옐로골드 이어링, 로즈골드 다이아몬드 링, 옐로골드 링은 모두 Cartier.

블루종 재킷과 셔츠는 모두 Alexander McQueen. 골드 브레이슬렛, 옐로골드 이어링, 로즈골드 다이아몬드 링, 옐로골드 링은 모두 Cartier.

어떤 사람에게 알리는 스포츠 선수보다 패션 아이콘으로 더 친숙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지지 하디드와 벨라 하디드처럼 세계적인 모델들이 속한 IMG 모델스 소속이기도 한 알리는 이미 수많은 매거진의 커버 스타로 등장했으며, 최근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까르띠에의 글로벌 앰배서더로도 발탁됐다. 패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는데, 대학생 때는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 구두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복서는 경기에 나가도 돈을 받진 못하거든요. 용돈을 벌어야 했죠. 퇴근하면서 샤넬, 디올, 코치 같은 럭셔리 매장을 지나칠 때마다 ‘언젠가는 나도?’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바라만 보던 멋진 옷을 입고 지금은 카메라 앞에 선다니 또 다른 꿈을 이룬 거나 마찬가지에요.”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뜨거운 심장의 소유자. 복서로서, 사회운동가로서, 모델로서 람라 알리는 언제나 세상과 치열하게 맞서왔다. 그는 자신에게 깃든 ‘싸움꾼’ DNA가 엄마한테서 물려받은 기질 같다고 고백했다. “아프리카 태생인 엄마는 저희 앞에서 한 번도 불평하거나 신세 한탄을 한 적 없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고요. 엄마야말로 진정한 전사죠.” 알리가 태어난 곳은 소말리아 모가디슈.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에게 닥친 비극은 어린 소녀의 삶을 통째로 뒤바꿨다. 소말리아 내전으로 혼자 정원에서 놀고 있던 알리의 큰오빠가 수류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소말리아에서의 어린 시절은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어요. 엄마는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죠.” 함께 난민길에 오른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목격하며 알리 가족은 케냐의 해안 도시 몸바사를 거쳐 어렵사리 영국에 도착했다. 전쟁의 혼란과 여파로 가득했던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 알리는 자신의 나이도, 생일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나이는 31세, 생일은 9월 16일로 정했어요. 진짜 생일처럼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요.” 

 
새틴 소재의 아이보리 재킷은 Nanushka. 레이어드한 니트 드레스는 MM6 Maison Margiela. 골드 이어링, 로즈골드 다이아몬드 링, 골드 다이아몬드 링은 모두 Cartier.

새틴 소재의 아이보리 재킷은 Nanushka. 레이어드한 니트 드레스는 MM6 Maison Margiela. 골드 이어링, 로즈골드 다이아몬드 링, 골드 다이아몬드 링은 모두 Cartier.

 
레더 코트 드레스는 Tod’s. 블루 부츠는 Molly Goddard. 옐로골드 이어링은 Cartier.

레더 코트 드레스는 Tod’s. 블루 부츠는 Molly Goddard. 옐로골드 이어링은 Cartier.

영국에서의 삶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으리라 예상하기 쉽지만 다행히 영리한 아버지와 대장부 같은 어머니 밑에서 알리는 정서적으로 부족함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소말리아 전통과 영미 문화가 공존하는 가정에서 자라며 알리는 백 스트리트 보이즈와 호주 싱어송라이터 피터 앤드리의 앨범, 책 〈오만과 편견〉에 매료됐다. 그러던 중 트라우마로 남은 또 하나의 사건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히잡을 쓴 채 코란 수업을 듣고 귀가하던 길에 난데없이 나타난 두 소년이 알리가 쓰고 있던 히잡을 강제로 벗기고 짓밟았다. 그 후로 알리는 다시는 히잡을 쓰지 않았다. “물론 제 신앙은 변함없어요. 기도도, 라마단 단식도, 기부도 온 마음을 다해 하죠. 단지 히잡만 쓰지 않을 뿐이에요.” 청소년기에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알리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이 사실을 눈치챈 어머니는 곧장 딸의 손을 이끌고 동네 체육관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알리는 여러 운동을 접하며 복싱과 만났다. 그러고는 운명처럼 깊이 빠져들었다. 복싱 실력은 갈수록 늘었고, 지역 시합에 참가할 때마다 기대 이상의 성과들이 따랐다. 집안 정서와는 맞지 않은 운동이었기에 가족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에서 참가한 복싱 경기가 뜻하지 않게 지역 방송을 탔고, 그 경기를 보게 된 가족은 알리가 복서가 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부모는 남에게 펀치를 휘두르는 딸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만류에도 알리는 몰래 경기에 나가며 꿈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마음 놓고 복싱에 매진할 수 없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복서가 됐을 텐데요.” 

 
블랙 드레스는 Petar Petrov. 블루 부츠는 Molly Goddard. 옐로골드 이어링, 옐로골드 링, 옐로 골드 다이아몬드 링, 트리니티 링은 모두 Cartier.

블랙 드레스는 Petar Petrov. 블루 부츠는 Molly Goddard. 옐로골드 이어링, 옐로골드 링, 옐로 골드 다이아몬드 링, 트리니티 링은 모두 Cartier.

알리의 엄마는 2020년 도쿄올림픽 전까지 딸의 경기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 틈에 기량이 충분히 무르익은 알리는 자연스럽게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를 꿈꾸게 됐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영국 국가대표 팀의 부름은 없었다. “슬프고 절망적이었죠. 이중 국적자이기도 하고,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으리라 짐작했지만요.” 지인의 권유로 소말리아 국가대표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조차 쉬운 일은 없었다. 육상 외 종목에 선수를 내보낸 전례가 없는 소말리아의 복싱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스스로 복싱연맹을 설립해야 했고, 영국이 아닌 소말리아라는 차선책을 택했다는 사람들의 비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알리는 자신을 보며 자긍심을 느꼈다는 수많은 소말리아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 속에서 다시 용기를 얻었고, 2020 도쿄올림픽에 출전해 16강에 오르는 투지를 보여줬다. 뜨거운 열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으로 가득한 이 드라마틱한 인생사에 매료된 게 비단 나뿐일까?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제작자 리 매기데이는 알리의 일생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다.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제껏 자신의 인생에 대한 판권을 사겠다는 여러 제안을 거절해 온 알리는 마침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기쁘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그의 첫 책 〈Not without A Fight〉 역시 조만간 세상에 나올 예정. 책 속에서 그는 훈련 도중 경험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자신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마음먹은 수많은 여성 스포츠인의 이야기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난민 출신. 소말리아 최초의 복싱 챔피언. 사람들이 관심 갖는 수많은 타이틀은 사실 제 인생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그중 많은 것은 지나간 과거이고요.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규정하길 바라지 않아요. 그저 또다시 세상과 싸우기 위해 링 위에 오른 지금의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사력을 다하는 제 몸짓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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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류가영
    사진 MEINKE KLEIN
    글 OLIVIA BLAIR
    스타일리스트 AURELIA DONALDSON
    헤어 스타일리스트 STEFAN BERTIN
    메이크업 아티스트 JENNY COOMBS
    네일 아티스트 MICHELLE HUMPHREY
    세트 스타일리스트 PHOEBE SHAKESPEARE
    패션 어시스턴트 LOIS ADEOSHUN
    디자인 민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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