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이태원의 오래된 빌라가 취향 좋은 주인을 만났다 #인테리어

20여 년에 걸친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입은 낡은 빌라가 상상력과 즉흥적인 DNA를 지닌 새 주인과 만났을 때.

BY이경진2021.10.07
 부엌과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아치형 출입구를 비롯해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장식이 가득한 거실.

부엌과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아치형 출입구를 비롯해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장식이 가득한 거실.

 
핀 율의 재팬 체어와 팝 아티스트 카우스의 아트 워크가 어우러진 풍경.

핀 율의 재팬 체어와 팝 아티스트 카우스의 아트 워크가 어우러진 풍경.

서울 이태원동. 웅장한 단독주택이 빼곡한 길목에서 민트색의 외벽으로 이뤄진 낡은 빌라가 존재감을 빛낸다. 키즈 웨어 브랜드 ‘꽁떼 레베’와 여성 패션 브랜드 ‘핫 페퍼 클럽’을 운영하는 박혜진은 이곳에서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산다. “대학 시절에는 이태원 시장으로 독특한 옷을 발굴하러 오곤 했어요. 당시 이태원 시장에는 굉장한 물건들이 많아서 꽤 자주 왔었죠. 저에겐 특별한 추억이 있는 동네예요.” 산책 삼아 걷다 보면 어느새 한남동과 경리단길에 닿고, 남산이 지척에 있으며, 한강공원도 가깝다. 4개월 전 이곳에 이사 온 뒤로 그녀는 휴일마다 편안한 차림으로 강아지들과 유유자적 걷고, 브랜드 쇼룸부터 크고 작은 전시장을 유영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준공된 지 20여년 된 빌라 내부에는 지금의 신축 빌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보물 같은 장식들이 시선을 끈다. 벽난로와 주방,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는 아치형 입구, 새시 없는 테라스까지. 집의 인상을 흥미롭게 만드는 이국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박혜진은 생활의 흔적이 묻어 낡고 자연스러운 빌라 곳곳을 뜯어고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기분에 맞게 즉흥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20년 전의 주거공간이라고 생각하면 꽤 진보적인 집이에요. 주로 외국인들이 렌트하며 살아왔기에 별다른 인테리어 리모델링 공사 없이 유지돼 왔다는 게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트렌드에 맞게 고치지 않은 집이라 더 좋았어요.”
 
다이닝 룸 벽면에는 이케아의 쿵스푸르스 선반을 설치했다.

다이닝 룸 벽면에는 이케아의 쿵스푸르스 선반을 설치했다.

 
을지로에 있는 철물점에 의뢰해 주문 제작한 철제 캐비닛들. 캐비닛 위에는 아끼는 프레임과 오래전에 구매한 빈티지 멤피스 조명을 올려 두었다.

을지로에 있는 철물점에 의뢰해 주문 제작한 철제 캐비닛들. 캐비닛 위에는 아끼는 프레임과 오래전에 구매한 빈티지 멤피스 조명을 올려 두었다.

 
직접 만든 철제 다이닝 체어와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빈티지 다이닝 테이블, 펜던트 램프로 채운 다이닝 룸.

직접 만든 철제 다이닝 체어와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빈티지 다이닝 테이블, 펜던트 램프로 채운 다이닝 룸.

 
다채로운 컬러와 소재로 채운 서재. 벽 선반은 박혜진이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다채로운 컬러와 소재로 채운 서재. 벽 선반은 박혜진이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박혜진은 오랜 세월 자신의 취향을 관통했던 가구와 사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이 집을 보자마자 상상하던 장면을 풀어냈다.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자신의 성향을 냉정하게 파악해 집에 인테리어 공사 비용을 투자하지 않았다. 파랑과 노랑의 손톱 만한 타일 조각으로 리드미컬하게 장식된 아치형 입구를 지나면 부엌과 다이닝 공간이 펼쳐진다. 햇살 가득한 창과 노란 커튼 덕분에 샛노란빛으로 물드는 다이닝 룸에는 스테인리스 선반과 유리 테이블, 노란 페인트로 마감된 철제 의자 등을 놓았다. 다이닝 룸은 노랑, 파랑, 빨강, 초록 등의 원색과 조금씩 낡고 벗겨진 빈티지 아이템, 스테인리스스틸이 지닌 특유의 미감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취향이 녹아든 총집합소 같다. 식탁에 앉으면 탁 트인 작은 테라스 너머로 멀리 관악산까지 보인다. 테라스에는 들풀이 흐드러진 정원처럼 화분을 빼곡히 놓았다. ‘집을 숲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무작정 꽃 시장에 가서 화분을 한가득 들여오던 바람대로 정말 집은 숲이 돼가고 있었다. “이 집에 오기 전에는 평창동에 있는 계곡 뷰의 집에 살았어요. 매끈한 타일 바닥 위에 소파와 조명을 듬성듬성 놓아둔 공간에 거주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아늑함을 이 집에서 찾고 싶었죠.”
 
드 세데의 검은 소파가 중심을 잡은 거실.

드 세데의 검은 소파가 중심을 잡은 거실.

 
20여 년 전 준공 당시의 디자인이 그대로 유지돼 레트로한 매력이 느껴지는 욕실.

20여 년 전 준공 당시의 디자인이 그대로 유지돼 레트로한 매력이 느껴지는 욕실.

 
캐노피형 침대 역시 직접 제작했다.

캐노피형 침대 역시 직접 제작했다.

 
다이닝 룸에서 이어지는 낭만적인 테라스.

다이닝 룸에서 이어지는 낭만적인 테라스.

강아지의 배변 패드와 장난감, 이로 물고 뜯은 각종 인형들이 널브러진 현관에는 박혜진이 목재로 직접 만든 아기 반려견들의 집이 놓였다. 이제 3개월, 8개월 된 작은 생명체들이 매일 구석구석 어지럽게 펼쳐놓는 일상의 흔적은 이 집만의 사랑스럽고 따뜻한 정취가 되어간다. “저는 직관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무언가 선택하고 들일 때 조목조목 따지고 계산하지 않아요. 집에는 당시 제 눈에 예뻐서 산 것들이 뒤죽박죽 모여 있어요. 계산 없이 들인 물건들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그 과정을 즐기는 거죠. 유심히 관찰하면서 물건과 관계를 맺는 기분이랄까요? 어디에 어울리겠다고 생각하며 구매했다면 지금만큼 제가 가진 모든 걸 좋아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 집은 그녀가 자신에게 예쁜 것,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마음껏 풀어놓은 세상 유일의 ‘빈칸’이자 해소의 공간이다. 취향이 변덕스러워 내일 당장 싫어지면 또 어떤가.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취향대로 만들어낸 누군가의 놀이터는 이토록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