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한 연애를 놓지 못하는 이유
」“‘네가 걸린 자궁경부암, 아무 남자하고나 자고 다니면 걸리는 거라던데?’ 아 XX 진짜.” (〈비혼세〉 Ep23. ‘망한 연애 올림피아드’ 중에서)
운영 중인 비혼 라이프 팟캐스트 〈비혼세〉의 인기 코너 ‘망한 연애 올림피아드’(이하 ‘망연올’)는 망한 연애 사연을 전시하는 코너다. 상담도, 조언도 없이 그저 각자가 보내온 경험담을 읽고 반응한다. 누가 봐도 망한 연애를 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갈아 넣고 나서야 탈출하는 사연들. 어떻게 망하느냐, 얼마나 망했느냐의 디테일은 다르지만 모두가 그 안에서 각자의 지난 연애와 맞닿은 지점을 찾아내고 얼굴을 붉혔다가 볼이 찢어지게 웃었다가를 반복하며 다음 ‘망연올’을 기다린다.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망한 연애를 반복할까? 이 사연의 공통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지 않는 근성이다. 이 정도 끈기와 인내심이면 나라도 세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대부분은 남은 사랑의 집착력 때문이지만, 거북목을 하고 앉아 모니터 속 사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망한 연애의 숨겨진 성분이 보인다. 알알이 박힌 사연자의 ‘자기 검열’이다.
‘애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상처받았는데, 내가 예민한 거야?’ 인터넷에 글을 쓰게 만드는 사람과는 연애하지 말라는 새 시대의 격언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망한 연애 앞에 판단력을 잃고 내 기분을 검사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여초’ 커뮤니티에서 자주 올라오는 이런 글이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간 제작진으로 몸담았던 〈쎈마이웨이〉 〈고막메이트〉 〈연애의 참견〉 같은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는 사람도 대부분이 여성이다. 대체 왜 그럴까? 혼자 판단을 내릴 능력이 부족해서? 줏대가 없기 때문에?
숏컷을 해서 괜한 오해를 사지 말 것, 꼭 머리를 짧게 자를 거라면 남녀평등 따위를 감히 부르짖어서 일부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안전한’ 숏컷임을 소명할 것, 오해받을 손가락 모양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거나 곧바로 사과할 것, 안 꾸미면 안 되고 너무 꾸며도 안 되니 ‘꾸안꾸’를 유지할 것…. 사회는 끊임없이 여성에게 미지의 적절성을 요구한다. 이 와중에 비이성과 예외로 점철되는 사랑이란 이름의 게임판 위에 선 여자들은 내가 적절한 애인인지 고민하며 끊임없이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1000번을 검열하고 100명에게 검증받아 봤자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예민한’ ‘이기적인’ ‘기가 센’ ‘말 안 통하는’ ‘이해심 없는’ 여자친구로 호명해 버리면 한순간에 내가 느낀 부당함이 묵살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인터뷰를 담을 때 꼭 마지막에는 “그래서 이제 슬슬 좋은 사람 만나셔야죠?”라고 묻고, 으리으리한 자가 건물을 소유한 월드 클래스 운동선수 여성의 화려한 삶을 조명한 후에 “애인이 없는데 외롭지는 않나요?” 하고 묻는다. 미치도록 사랑을 사랑하고, 연애와 연애하는 사회다. 내게 부당한 상대를 끊어내는 것은 연애 상태의 파기를 의미하는데, 연애지상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거대한 ‘스펙’을 내려놓는 것과 같아서 여러모로 결단하기 버거운 것이다. 망할 대로 망해서 ‘그 새끼 다시 만나면 너 나랑 연락할 생각 하지 마’ 같은 소리를 친구한테 4000번쯤 듣고, 너덜너덜해진 뒤에야 비로소 자연사하듯 연애의 소매를 놓기도 한다. “이게 우리 잘못이야? 이 세상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잖아!” ‘망연올’에서 자주 외치는 말이다.
흔해 빠진 망한 연애란 걸 알면서도 요상한 근성으로 놓지 못했던 흑역사를 기꺼이 펼쳐주는 독자들에게 사랑을 보낸다. 지나고 돌아보니 스스로 한심하고 들추기도 아픈 이야기들을 위트 있게 들려주는 것은 언제든 망할 수 있고, 망해온 우리끼리의 거대한 연대일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게 망한 연애란 걸 알아차리라는 신호, 당신만 그런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니니 괜찮다는 위로,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생존자들의 메시지. 그래, 뭐 어떤가. 앞으로도 망한 연애를 할 수 있지만, 알몸으로 태어나서 사연 하난 건졌잖소. 안 그래요?
곽민지 다양한 비혼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예능 팟캐스트 〈비혼세〉 진행자이자 출판 레이블 ‘아말페’ 대표. 〈걸어서 환장 속으로〉 〈난 슬플 땐 봉춤을 춰〉를 썼다. 여성의 몸과 사랑, 관계에 관심이 많다.
엘르 뉴스레터 '엘르보이스'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