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한 계절에 몇 번이나 될까. 세상에 같은 초록은 없고, 같은 모양의 잎사귀도 없다. “나무에게 미안한 책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라는 메시지와 함께 작가 엄유정은 간결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그림체로 쪽빛 에너지를 112점의 드로잉과 페인팅에 밀도 있게 녹여냈다. 간결한 스케치 형태의 잎사귀들은 페이지를 뒤로 넘길수록 입체감을 얻고, 제각각 다른 빛깔의 초록을 입는다. 그 생생함은 책 끝부분에 다다를 무렵, 손끝에 잎새의 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 독일 라이프치히도서전과 북아트재단이 선정한 ‘202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골든 레터 수상작. 활자 하나 없이도 이름값에 걸맞은 수만 개의 초록빛은 여름의 힘찬 파동을 마음 깊숙한 곳까지 안긴다. 미디어버스 펴냄.
영원의 순간을 전시한 사막 속 갤러리라니! 독립서점 한 켠, 표지를 보는 순간 별다른 설명 없이도 무심코 집어들게 되는 시원한 그림책이다. 펼치는 순간 어떤 차림으로 어느 곳에 서 있든 독자는 김경희 작가의 그림 속 오아시스 갤러리로 초대된다. 사계절 내내 수풀 내음이 나는 ‘초록의 숨’, 시작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물결이 끊임없이 치는 ‘호수의 파도’, 노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두 번의 일몰’ 구간까지. 책은 도심에서 탈주해 언제까지고 원하는 만큼 턱을 괴고 보고 싶은 풍경을 갤러리에서 작품 감상하듯 음미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깊은 고민이 필요 없다. “앉은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숲이 있는 듯합니다”라는 구절을 따라 그저 자유롭게 상상하며 마음을 환기하면 그뿐. 텀블벅 펀딩 300%를 달성하며 지난여름 탄생한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책. 캄포엠 펴냄.
“저 사람은 매일 혼자 뭘 하는 걸까?” 정원 풍경을 담는 화가를 보며 고양이는 독백한다. 그들은 덩굴장미가 흐드러진 ‘우리의 정원’을 매개로 교감하지만, 고양이는 곧 새로운 만남을 찾아 떠나버린다. 빈 정원에 홀로 남은 화가는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을 상기하며 ‘너의 정원’을 그린다. 책을 덮고 나면 독자의 마음에도 오롯이 피어날, 과슈로 그린 밀도 높은 정원 풍경에는 누군가의 텅 빈 마음을 빽빽이 메우려는 작가의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묻어 난다. 국문학을 전공한 나현정 작가는 인간과 환경, 관계와 기억을 주제로 현대인이 느낄 법한 외로움을 풍부한 서사가 전해지는 그림 속에 담아왔다. 눈치 없이 싱그럽기만 한 풀꽃들이 얄미울 때, 그늘이 드리운 누군가의 마음속 정원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 ‘너의 정원만 그런 게 아니야’라며 정성스럽게 위안을 건네는 책. 글로연 펴냄.
「 신디 데비, 데보라 언더우드 〈Outside in〉
」 자연과 사람이 머무는 공간은 언제부터 철저히 분리되기 시작한 걸까. 〈조용한 그림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판한 데보라 언더우드가 쓰고 인형극 디자이너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변신한 신디 데비가 그린 이 책은 심오한 고민을 시적 언어와 아름다운 그림으로 풀어낸다. 나무와 달팽이, 새, 꽃줄기 하나까지 다시 사람 곁으로 다가가려는 자연의 생명력 넘치는 손짓을 실에 수채물감을 묻히거나 마른 꽃 줄기에 잉크를 적시는 방법을 통해 독창적이고 거친 느낌으로 표현했다. 판타지 동화처럼 펼쳐지는 신비로운 풍경 이면에는 도시화된 삶과 환경 오염, 단절 문제를 설득력 있게 포착한다. ‘밖에 나갈 때조차 우리는 안에 머문다’는 비유적 표현은 건물과 건물, 건물과 차 사이만을 오가며 진정한 밖(자연)에 머무르지 못하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전할 듯. 2021 칼데콧 아너 수상작으로, 얼마 전 〈자연이 우리에게 손짓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출간했다. HMH Books 펴냄.
〈빨간 모자〉 〈잃어버린 영혼〉 등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아온 폴란드 작가 요안나 콘세이요의 오래된 사진집 같은 그림들은 잊고 지낸 빛바랜 기억을 건져 올린다. 가보지 않은 곳마저 직접 가본 듯한 향수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이번엔 성장통을 겪는 소년 M과 함께 바다로 갈 차례다. 〈바다에서 M〉은 특유의 사각사각 연필 소리가 들리는 듯한 섬세한 필체로 여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포착했다. 불완전한 M의 감정을 따라 그림 속 파도는 낮고 잔잔하게 빛나기도, 금방이라도 덮쳐올 듯 몸집을 부풀리기도 한다. 작가는 어릴 적부터 보아온 발트해의 파도 색을 그대로 구현해 낼 종이 한 장까지 세심하게 고를 정도로 색 표현에 힘썼다. 덕택에 독자들은 책을 집어든 순간부터 M과 그가 마주한 풍경에 흠뻑 몰입하며 잔잔하던 감정이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멋진 경험이 가능하다. “파도가 예상치 못한 빛을 반사하고, 온 바다가 데이지 꽃밭처럼 반짝였다.” 독백과 함께 마침내 커버린 M이 석양에 빛나는 황금빛 바다와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어른이’ 독자 역시 그 바다 앞에 서 있는 듯 눈부신 위안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사계절 펴냄.
「 곽수진,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 일본의 대표 동화 작가이자 시인, 농업과학자인 미야자와 겐지는 글을 통해 사는 방식에 관한 물음을 던졌다. 그의 사후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시 ‘비에도 지지 않고’가 〈별 만드는 사람들〉로 볼로냐국제도서전 사일런트북 대상을 수상한 그림 작가 곽수진의 손길로 되살아났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고,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라는 시구와 함께 펼쳐지는 비 갠 풍경은 욕심 없이 그저 더위와 비와 바람에 지지 않겠다는 소박한 마음을 품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원경으로 보이는 산골 마을과 들판, 그 길을 따라 걷는 젊은이, 그를 마중 나온 강아지까지 제각각 다르다. 소소한 풍경 하나하나에는 시대를 뛰어넘은 두 작가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스며 있다. 읽고 나면 마스크에, 건물 안팎의 열기에 지친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든다. 언제나북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