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라 페르마타의 실내 정원. 녹음이 우거진 다이닝 룸. 반려견 올리브와 일레븐은 부부를 따라 집 안팎을 자유롭게 누빈다.

서울 한남동, 재개발 지역이 된 주택가 사이에 숨은 숍 ‘페르마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오래된 목재 대문으로 시작된다. 묵직한 문을 지나 회색 계단을 오르고, 넝쿨 같은 나뭇가지 사이를 헤치며 페르마타에 들어서면 도시의 가쁜 호흡이 잠시 멎는다. 시대 미상의 고재 캐비닛에 바르셀로나 브랜드 ‘페일 스윔웨어’의 수영복, 프랑스 브랜드 ‘라 수플레리’의 석고 조각 컬렉션, 19세기 예술가들의 작업복을 모티프로 한 드레스까지…. 지난 10여 년간 페르마타를 이끈 디자이너 최혜진과 모델리스트 윤권진 부부는 이곳에서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오가닉한 멋, 뚜렷한 감도를 지닌 제품을 선보여왔다.

폐컨테이너 박스의 외벽에 오래된 목재 패널을 붙여 만든 오두막. 윤권진의 목공 작업실이자 부부의 아지트다.

집에서 최혜진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방. 이 집에 있는 가구의 대부분은 고가구 판매상에서 구했다. 최혜진은 흡사 귀신의 집 같던 가게에서 조금만 손보면 아름다워질 보물 같은 물건들을 발견하며 행복했다.

나무 토막과 벽돌을 쌓아 만든 책장.
부부는 4년 전, 거주하던 집을 개조해 지금의 페르마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용인의 한 시골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시골에 사는 게 꿈이었거든요.” 비닐하우스 하나 덩그러니 있던 대지를 보고 최혜진과 윤권진은 한눈에 반했다. 누군가는 가치 없는 땅이라 했지만 둘에게는 정남향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양지바르고 따뜻한 땅이었다. 대지 뒤편으로 우거진 작은 숲도 있었다. 부부는 홀린 듯 땅을 사고 집을 지었다. “흙밭에서 시작했어요. 일단 집을 짓고 나서 한 해 한 해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왔어요. 아주 천천히요.” 틈날 때마다 꽃 시장을 들락거리며 모은 풀꽃과 나무를 정원에 심고, 정원 곳곳을 손질하며 집을 손보는 일은 고단했다. 하지만 손쓰는 만큼 정직하게 바뀌어가는, 느리게 변화하는 집을 지켜보는 일은 늘어진 시간만큼 좋았다. 그사이 키 작은 나무로 시작한 수국은 꽃봉오리가 수박만큼 커져 장마철이면 한껏 물을 먹고 무거워져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으로 자라났다.
“이건 어제 사서 심었어요. 오이풀꽃. 그 옆엔 아미초예요.” 페르마타 특유의 미묘한 감수성, 수채화 같은 컬러 팔레트가 그들의 정원에 그대로 펼쳐진다. “프린트도, 색으로 표현하는 작업도 정말 좋아하는데 페르마타 대부분의 프린트와 색감이 이 집 정원에서 와요. 색과 형태, 디자인 밸런스를 보는 관점에 정원이 영향을 줘요. 정원에서 문득 생각지 못한 색의 조합을 찾을 때가 있고, 어디에선가 씨가 날아와 우연히 핀 꽃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 색을 다시 보기도 하고요.” 넓은 주방과 집을 둘러싼 마당, 풍성한 수국, 둥근 돌을 쌓아 만든 돌담만큼 중요했던 건 집의 4면에 창과 문을 내는 일이었다.

큰 주방에서 이어지는 공간. 왼쪽 녹색 문을 열면 한창 짓고 있는 온실과 오두막이 있는 뒷마당이 펼쳐진다.

볕이 드는 넓은 주방. 정형화되지 않은 러프한 멋을 사랑하는 두 사람의 취향이 드러난다.

수국으로 둘러싸인 야외 테이블. 부부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부부는 마치 물 흐르듯, 뒷마당에서 앞마당으로, 다시 수국으로 둘러싸인 집의 동쪽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안과 밖의 경계 없이 지낸다. 춥지 않은 계절의 대부분을 둘은 야외에서 보낸다. 아침에 정원으로 나가 식사도, 놀이도 밖에서 즐긴 뒤 밤이 되어야 집 안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집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이 땅에 해가 어떻게 뜨고 지는지를 알아가며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살면서 계속 고치고 있어요.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저 문도 벽을 뚫어 만든 거예요.” 3년 전에는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의 외벽에 고재 패널을 붙여 만든 오두막을 뒷마당에 세웠다. 고령의 숲에서 우연히 조우할 법한 짙은 밤색의 이 오두막은 윤권진의 공간이다. 그는 오두막에서 많은 일을 한다. 에어컨 실외기를 덮어 가릴 거대한 나무 상자를 짜고, 작은 선반도 만들고, 고장 난 생활 기기도 고친다. 그 곁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는 시간은 최혜진이 이 집에서 겨울을 나며 느끼는 큰 행복 중 하나다. 윤권진은 이제 온실을 짓고 있다. 물을 주려면 매일 1시간씩 족히 걸리는, 집 안의 수많은 식물을 위한 공간이다. 이번에는 오롯이 제 손으로만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렸다. 쉬는 날 조금씩 홀로 짓다 보니 여전히 미완성이다.

소나무로 만든 라이팅 데스크.

정원에서 볼 수 있는 하늘하늘한 수채화풍 장면들은 집 안 곳곳에도 이어진다.

윤권진이 직접 짓고 있는 온실과 뒷마당 한가운데 선 작은 나무 한 그루.
“살아보니 여기 석양이 예뻐요. 그래서 서쪽 벽에 창을 더 크게 내려고 해요. 지금의 창을 들어내고요.” 최혜진이 말했다. 한남동의 페르마타에는 5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정원이 있다. 최혜진과 윤권진이 그곳에 살 때, 둘은 정원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오로지 정원만이, 일과 상관없는 장소였다. 부부는 조그마한 정원에서 쉬기도 하고, 꽃나무도 심고, 작은 피크닉을 열며 빠짐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게 너무 좋았어요.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지금 이 집은.” 페르마타. 음악의 곡조에 변화를 주고자 박자 운동을 잠시 멈추거나 늦추도록 지시하는 기호. 도시에서의 루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어낸 부부의 시골집은 바깥 세계와는 상관없는 박자와 음정으로 흐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