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은 사진의 등장으로 예술 작품의 아우라는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미술관에 걸린 거장의 진품 그림을 구글 검색으로 간단하게, 저렴히,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됐으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가져다 사인을 한 것에 불과한 마르셸 뒤샹의 '샘',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이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재밌는 건 뒤샹과 워홀의 작품 원본 가격이 천문학적이라는 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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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는 한 발짝 더 나아갔습니다. 예술 작품이나 콘텐츠, 각종 아우라를 지닌 것들의 복제품에 NFT(Non-Fungible Token)란 휘황찬란한 망토를 씌웠죠. '대체 불가능 토큰' 정도로 번역되는 NFT는 디지털 세상의 '원본 소유권'입니다. 가상자산이라는 점에선 암호화폐와 맥락이 비슷합니다. 디지털 파일에 블록체인 기술로 고유값을 부여하고, 진품 인증과 소유권을 보장합니다. 메타버스라 이름 붙인 가상세계의 등장과 NFT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21일 카카오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가 NFT 유통 플랫폼인 클립 드롭스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선 화가로도 활동 중인 배우 하정우의 NFT화된 그림을 살 수 있습니다. 작품도 암호화폐로 거래되죠.
22일(현지시각)에는 애플 창업자 故 스티브 잡스가 '취준생' 시절 작성한 입사지원서가 NFT로 경매에 나왔습니다. CNBC에 따르면 이번 경매에는 입사지원서 원본과 NFT가 나란히 부쳐졌다는데요. 어느 쪽의 가치가 더 높이 책정되는지를 알기 위해 이 같은 진행 방식을 택했다는 게 주최측 입장입니다.

Winthorpe Ventures
NFT 돌풍에 국보 훈민정음까지 휘말렸습니다. 훈민정음을 보유 중인 간송미술문화재단은 22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100개 한정 NFT로 발행하고자 한다"라고 발표했어요. 1개당 가격은 1억. '디지털 자산으로 영구 보존하겠다'는 말 뒤엔 '미술관 운영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는 취지'라는 재단의 진심도 담겼습니다. 지난해 간송미술관은 재정난을 이유로 통일신라시대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놔 비판을 받기도 했죠. 결국 이 불상들은 논란 속에 유찰됐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사들였어요.

간송미술관(퍼블리시)
문제는 훈민정음이 단순 미술품이 아니라 국가 문화재라는 점입니다. 해례본은 사실상 유일한 훈민정음 인쇄본이기도 하고요. 훈민정음을 이미지 파일로 촬영하기 위해 꺼내는 순간부터 손상은 시작됩니다.
이번 간송재단의 발표는 여러 가지 생각을 만듭니다. 훈민정음 원본의 NFT 파일은 간송재단이 부여하는 고유 번호만으로 원본성을 부여받게 되는 걸까? NFT 파일을 1억 원 주고 사면 훈민정음 디지털 파일 소유권의 100분의 1을 갖게 되는 건데, 도대체 이 '훈민정음 디지털 파일 원본 소유권 100분의 1'이 갖는 가치는 뭘까? 훈민정음의 NFT화, 문화재청의 최종 결정을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어쩐지 뒷맛은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