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유토피아를 꿈꾼 디자이너들

유토피아를 꿈꾸며 희망을 노래하는 디자이너들.

BY김지회2021.06.19

Nowhere 

ANYWHERE

 
 
마감이 극한에 다다른 날이면 옷장에서 화려한 원피스나 새하얀 레이스 블라우스를 꺼내 입는다. 다크서클이 흘러내려도 안색과는 상관없는 선택이다. 퍼프 소매 드레스에 땀이 찬 에나멜 부츠를 신고 우다다다 키보드를 치는 모습을 보고 사무실 긴장감을 깨는 질문이 날아든다. “(오늘 같은 마감에 설마) 술 약속 있어?” “네(저와의 술 약속이요).” “소개팅 있니?” “네(스태프 미팅이요).” 매달 돌아오는 재앙 같은 마감에 공주 같은 드레스를 입는 건 까만 옷을 입고 어둠의 아우라를 내뿜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다. 고통의 끝을 바라는 염원이다. 
 
 
마감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팬데믹 속에서도 랜선 패션쇼가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 공개된 쇼들은 막막한 상황 속에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처럼 한껏 멋 내고 출근한 내 모습과 비슷했다. 희망과 일탈이 뒤섞인 마음을 표현한 모습 말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검은 사제를 연상시키는 룩과 생존을 위한 세련된 기어가 불안에 빠진 반항적인 힙스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지난 시즌과는 달리 최근 열린 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침체된 이들을 껴안고 어루만진다. 레몬 옐로, 버블검 핑크처럼 이름만큼 산뜻한 컬러들이 주목받는가 하면 시퀸 소재와 깃털 장식 등 20년대부터 60년대, 80년대를 넘나들며 시대를 아우르는 드라마틱한 룩들이 선보였으니까. 집콕으로 달라진 리듬에 이미 익숙해진 라운지 웨어와 화려한 드레스를 믹스매치한 실용적인 스타일링도 자주 포착됐다. 달라진 건 과감해진 스타일링뿐 아니라 이런 룩을 담은 연출 방법이다. 우르르 쾅쾅 번개가 치고, 불길이 치솟으며 홍수가 범람하는 무대를 벗어나 디자이너들은 각자 생각하는 판타지 속 무대로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기분 좋은 소리와 시각 자료를 모은 ‘Feel Good’ 영상을 2021 F/W 쇼 영상 대신 공개했던 발렌시아가는 영상을 공개하고 난 뒤 다양한 관광 명소와 합성한 컬렉션 사진을 공개했다. 사랑을 맹세한 자물쇠로 가득한 퐁네프 다리,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건축물과 네온사인이 빼곡한 도쿄 거리 등 그 도시를 여행했다면 스마트폰 어딘가에서 ‘2년 전 오늘’ 하고 불쑥 튀어나올 법한 사진들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출국의 설렘을 담은 브랜드도 있다. 발망은 2021 F/W 쇼를 에어 프랑스 격납고에서 펼쳤다. 낙하산 드레스부터 레이스업 비행 부츠, 점프수트 등 초창기 파일럿과 우주 비행사들의 유니폼에서 힌트를 얻은 것. 비행기 엔진의 배선과 구조, 기계 등도 의상 디테일에 스며들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려 해요. 피날레에 등장한 달은 별빛 가득한 미래에 발을 내딛는 기분을 표현했죠.” 배 위에 이어 비행기까지 한결같이 긍정적인 쇼를 펼쳐온 올리비에 루스테잉의 말이다. 생 로랑을 이끄는 안토니 바카렐로는 혹독한 자연에 맞서는 편을 선택했다. 깎아낸 듯 아슬한 절벽과 부서지는 파도를 지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폭포수 앞에 선 모델들은 그간 선보여 온 부르주아 코드를 버리고 메탈릭한 저지 보디수트에 트위드 재킷을 더하는 식의 틀을 깬 연출을 시도했다. 
 
 
저항하는 방식에 셀린을 이끄는 에디 슬리먼도 합세했다. 2020 S/S 시즌 경기장 트랙을 따라 실용적인 룩을 선보인 그는 이번 2021 F/W 멘즈 컬렉션에선 백마를 탄 10대 기사를 등장시켜 샹보르 성을 향해 달리는 저돌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마치 현실에 굴복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런가 하면 동화 속 유토피아를 꿈꾼 쇼에선 백마 외에도 신비로운 동물들이 등장했다. 버지니 비아르는 베스티아리(동물 우화집)를 좋아했던 가브리엘 샤넬을 떠올리며 오트 쿠튀르 쇼에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델 롤라 니콘이 회색 말을 타고 정원을 거니는 장면을, 크루즈 쇼에선 장 콕토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빛의 채석장에서 하얀 비둘기를 날리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가장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를 그린 건 구찌의 아리아 컬렉션이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런웨이 끝 상상 속 사보이의 문을 열자 쏟아지는 햇빛과 함께 공작과 토끼, 백마가 뛰어노는 풍경이 펼쳐졌다. 문밖을 나선 모델들은 피톤치드를 가득 머금은 공간에서 깊이 호흡했다. 마스크를 벗은 온전한 숨결의 축제가 열린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은 세상을 몸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 숨을 내뱉는 것은 세상에 우리를 보내는 것이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철학가 E.코치아(E.Coccia)의 글을 인용하면서 숨 쉬는 생명체들의 연약함에 대해, 생명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의지와 능력을 향해 찬사를 보냈다. 패션이라는 방법을 통해 판타지를 심어주고 소통하는 디자이너조차도 결국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어떤 환상이 지금을 위로하고 고통을 잠시 잊게 할 뿐. 그들이 건넨 한 편의 동화 같았던 짧은 패션 필름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뒤로 나약함을 감추지 말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른 생명들과 함께 연대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