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저하늘 끝까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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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죽기 전에 여행기 하나 쓰고 싶은 욕망이 없을까. 언젠가 버마의 불교 성지 바간에서 2000개가 넘는 파고다 더미가 내려다보이는 높이에 섰을 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 내겐 경이로운 풍경을 기록할 흔한 디지털 카메라 하나 없었고, 기억의 저장고에 넣어둘 만한 여력도 없었으며, 그 풍경의 이면에 새겨진 상처까지 다룰 능력이 더더욱 없었다. 문자 그대로 여행기의 시대다. 을 쓴 재능 있는 알랭 드 보통 씨가 이라는 책이라도 낸다면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고도 남을 분위기. 그 와중에 지난 주 어느 시사 주간지의 기획 기사 중 하나는 연간 출국자 1천만 시대의 ‘여행책 러시’를 다룬 것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블로그에 여행기를 포스팅하고, 그중 대부분이 여행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리포트 곳곳에서 여행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저요, 저요” 손을 들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씁쓸한 느낌이 들었던 건 나만의 ‘몽니’일까? 무수히 쏟아지는 여행의 기록들이 동어반복의 지루함만 안겨줄 뿐이라는 건 나만의 기시감일까? 뉴욕이나 파리 같은 흔한 소재의 감도 낮은 기획성 여행기는 뒤로하고라도 남미의 오지까지 단숨에 트렌디한 여행지로 바꿔놓는 여행작가들의 균질한 여행기 레서피와 식성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여행기라는 장르는 정서적 면모와 인식적 면모가 절묘하게 길항할 때 빛을 발한다. 그러니 정서적 고백이 지나치게 주관으로 떨어지고 급기야 팬시한 낭만 덩어리로 굳어질 때, 인식적 면모의 함량이 2퍼센트 부족한 게 아니라 2퍼센트가 전부일 때, 바짝 경계해야 한다. 일본의 사진작가 후지와라 신야와 소설가 유재현이 20년의 시차를 두고 아메리카를 여행한 기록은 그런 점에서 박수받을 구석이 많은 책이다. 각각 모터홈과 소형 승용차를 렌트한 뒤 서부 태평양 연안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2만 마일을 달리며 미국의 표층을 훑은 기록에는, 가볼 만한 여행지와 핫한 숍, 트렌디한 레스토랑 따윈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우리가 미처 알고 있지 못한 아메리카의 뒷모습이다. 다른 게 있다면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에 정서적 면모를 살짝 더한다면, 유재현의 여행기는 인식적 면모가 강하다는 것. 굳이 가른다면 사진가와 소설가의 차이랄까? 전작 에 비해 훨씬 적은 사진이 실린 후지와라 신야의 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장면과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끝난다’는 노랫말을 떠올리며 로드 무비의 나라를 횡단한 그에게 아메리카는 ‘인간 문명의 마지막 풍경’이다. 한국식 거리로 3만2000킬로미터를 달리며 그가 목격한 건 팀 버튼의 영화 세트에나 등장할 법한 무표정하고, 실재감이 희박한 인공의 거리였다. ‘콜라 거품처럼 쉽게 사라지는’ 미국의 이미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하던 그가 여행의 말미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미국의 의식주를 지배하고 있는 과잉된 인공 조작,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맥도널드와 데니즈 등의 외식 산업, 거리를 뒤덮어버린 투바이포 건축물, 슈퍼마켓에 진열된 대량생산 품목, 이 거리는, 그리고 사람들의 사고와 육체는 대량소비를 목표로 하는 아메리카 기능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 문명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더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미국이라는 영화를 탄생’시켰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류가 시작된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미국’의 실체가 그렇다는 얘기다. 전작 에서 ‘인식적’ 여행기의 전범을 보여준 유재현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출사표부터 남다르다. 토크빌을 비롯해 미국을 여행한 유럽인들, 마크 트웨인과 존 스타인벡 같은 미국의 지성들은 동부에서 서부로 여행한 기록을 남겼다. 동부 연안에서 시작해 서부 태평양 지역으로 팽창해간 미국의 역사를 따르는 동선이다. 유재현은 정반대의 동선을 그린다. 유럽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여행하면서 ‘다른’ 시선으로 미국을 살피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여 년 전 후지와라 신야가 거쳐간 길을 달리며 유재현이 목격한 미국은 어떤 모습일까? “미국은 탐욕과 적대의 제국이며, 오래된 패권의 피로가 충만한 나라다. 스스로 벌인 전쟁으로 인해 불안에 떨며 타인에게 감시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미국의 신민, 제조업의 쇠퇴로 자본주의의 외부로 밀려난 사람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차별의 벽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통해 두려움의 대상일지언정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나라, 미국의 초상이다.” 같은 길을 달렸던 후지와라의 ‘인간 문명의 마지막 풍경’이라는 결론과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두 작가의 여행기는 컵케이크처럼 달콤하고 말랑한 여행기에 젖은 이들에겐 푸석하다 못해 딱딱한 여행기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잘 빚어진 여행기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법 아닐까? 쓸모없는 글로 책을 내는 걸 죄악으로 생각하는 어느 소설가가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종이를 소비하는 자세를 기준으로 보면 이건 ‘재앙’에 가깝다.” 여행기 인플레이션 시대에 떠올릴 만한 괜찮은 훈계 아닐까, 라는 건 나만의 과격한 상상일까? New Book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거장들의 신간 목록1 필립 로스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이 ‘미국 현대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매년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점쳐지는 작가의 2006년작. 필립 로스의 스물일곱 번째 장편소설이며 작가에겐 세 번째로 펜/포크너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이다. 한 남자가 늙고 병들어 죽는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 나이 듦과 상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문학동네2 존 쿳시폭력적인 위계질서의 실체와 허상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작품 세계로 두 차례의 부커상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거장의 2007년작. 지금까지 발표된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인 소설로 평가된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안야,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일흔이 넘은 저명한 작가 세뇨르 C의 대화를 주된 줄거리 삼아 정치, 문학, 예술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작가의 의견들이 펼쳐진다. 민음사3 존 업다이크외아들로 태어나 수도원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외롭게 성장한 오웬이 재혼한 아내와 은퇴 후의 일상을 보내며 기억 속에 저장된 여성들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진부한 듯한 소재와 줄거리에 속지 마시길. 작가가 존 업다이크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얘기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영미권 작가로 불리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흥미가 배가된다. 영림카디널*자세한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12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