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DALENA
WOSINSKA

헤어롤을 만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엄마. 2016.
오래전, 가족 앨범을 보다가 엄마의 옛날 사진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사진 속 인물이 나처럼 보였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발랄한 포즈와 미소 띤 얼굴, 턱선에선 익숙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나이 들고, 허약한 엄마를 떠올리며 두렵기도 했다. 지금 내 모습도 언젠가는 쪼그라들어 사라질 거란 생각에.
아마도 그게 5년 전부터 엄마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한 이유일 것이다. 엄마의 모습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마음과 함께 노쇠해진 몸뚱어리 이면에는 여전히 강인하고 매력적인 한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의 이름은 빌헬미나 보신스카(Wilhelmina Wosinska). 폴란드 출신인 부모님이 미국에 터를 잡은 지도 꽤 오래됐다. 폴란드에서 최연소 박사 학위를 취득한 심리학 교수였던 엄마는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고, 항상 네일과 헤어스타일까지 완벽하게 신경 쓰던 유쾌한 지성인이었다. 연애 시절에는 아빠와 함께 수준급의
춤 실력으로 온갖 파티를 주름잡았고, 직접 낭독회를 열기도 했으며, 친구의 대부분이 교수나 의사였다.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 화려한 이력, 사회적으로 탄탄했던 삶. 이는 47세가 되던 해, 딸들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거란 확신으로 미국 이주를 결심한 엄마가 포기한 것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엄마가 우릴 위해 희생한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머리가 비상했던 엄마조차 미국의 삶이 이토록 힘든 것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엄마는 항상 새벽 5시에 출근했고, 며칠 밤을 새우며 학생들의 시험 점수를 매겼지만 미국에서 단 한 번도 정교수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부 학생들로부터 점수가 짜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때론 협박까지 받으면서 엄마는 특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셋째 언니는 여섯 살에 세상을 떠났고, 3년 뒤 내가 태어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죽은 언니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이른 나이에 박사 학위를 따거나 3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성취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성취욕을 부추기는 건 오로지 사진이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열아홉 살에 덜컥 LA행을 결정했을 때 엄마는 내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사진으로 엄마와 내 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운명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언제나 멋스러웠던 젊은 시절의 엄마.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 화려한 이력, 사회적으로 탄탄했던 삶. 이는 47세가 되던 해, 딸들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거란 확신으로 미국 이주를 결심한 엄마가 포기한 것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엄마가 우릴 위해 희생한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머리가 비상했던 엄마조차 미국의 삶이 이토록 힘든 것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엄마는 항상 새벽 5시에 출근했고, 며칠 밤을 새우며 학생들의 시험 점수를 매겼지만 미국에서 단 한 번도 정교수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부 학생들로부터 점수가 짜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때론 협박까지 받으면서 엄마는 특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셋째 언니는 여섯 살에 세상을 떠났고, 3년 뒤 내가 태어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죽은 언니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이른 나이에 박사 학위를 따거나 3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성취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성취욕을 부추기는 건 오로지 사진이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열아홉 살에 덜컥 LA행을 결정했을 때 엄마는 내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사진으로 엄마와 내 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운명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피닉스에서 LA로 향하는 길 위의 휴게소에서. 2015.
한창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2007년, 나는 촬영 중에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있어. 어쩌면 죽을 수도 있대.” 아무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상황의 심각성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서 본 엄마는 입이 약간 벌어진 채로 시체처럼 곧게 누워 있었다. 피부는 움푹 꺼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엄마는 하룻밤 사이에 65세 할머니가 돼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야속하게도 입원하는 동안 엄마에게 두 번의 뇌졸중이 더 찾아왔다. 잠에서 깬 엄마는 종종 지금이 1942년 나치 시절인 줄 착각했고, 프랑스어로 말을 했으며, 우리한테 ‘라 비앙 로즈’ 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는 엄마는 무한 보호와 애정을 필요로 했고, 자연스럽게 우리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가 돼버린 엄마를 대신해 언니들과 나는 어른이 돼야 했으니까. 몇 달 후 다행히 엄마는 퇴원하게 됐지만, 나는 이후에도 LA에서 피닉스까지 차로 6시간의 거리를 오가며 엄마를 간호해야 했다. 언니들과 나는 돌아가며 엄마를 목욕시키고, 기저귀를 갈고, 머리를 감겼다. 우린 엄마의 상태가 나아질 거라 믿었지만, 수개월이 흘러도 눈에 띌 만한 변화는 없었고, 조금 나아졌다 싶을 때마다 노화는 엄마를 자꾸 퇴보시켰다.
슬픔과 우울에 파묻히기 쉬운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우리 가족은 엄마와 우리에게 찾아온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엄마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단기 기억이 약해졌기 때문에 엄마는 종종 같은 말을 반복했다. 때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날도 있었다. 이야기 주제가 대부분 섹스나 제2차 세계대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야기할 수 있을 때면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줄 알았다. 또 엄마는 밝은 핑크색 옷만 입고 싶어 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상황을 즐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처음 엄마에게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엄마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어떤 모습이 찍히든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벗은 몸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조차도. 나 또한 엄마의 나체를 찍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 행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산책 중인 엄마의 모습. 2017.
인간의 나체는 삶의 가장 현실적인 장면 아닐까? 엄마의 벗은 몸은 가장 원초적이고 투명한 삶의 진실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우리는 늙는다는 것. 많은 사람이 엄마의 나체 모습을 기록한 이유를 묻곤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찍은 엄마 사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내가 엄마 사진을 찍으며 느낀 순수한 아름다움을 그들도 똑같이 느끼는지가 훨씬 더 궁금하다. 그게 엄마의 나체 사진을 인스타그램 계정에 포스팅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악플 몇 개쯤은 달릴 거라고 예상했건만 놀랍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엄마에게 지금이라도 전화해야겠네요.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줘 감사합니다”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워요” “치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부분을 드러내기로 한 용기가 대단하네요” 등등. 내 사진을 계기로 처음으로 엄마란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한 사람도 많았다. 나는 여전히 엄마 사진을 업로드하며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기를 바란다. 정말이다. 엄마에게 다가가고, 묻고, 듣는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빌헬미나 보신스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삶의 본질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됐으니까.
지금 내 눈앞엔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 노쇠한 여인이 있다. 현재 엄마는 부분 마비에 시달리고 있지만 사진 작업만큼은 여전히 잘해내고 있다. 시시때때로 찾아온 위기 속에서도 엄마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잊지 않았다. 고맙고, 자랑스럽다. 사진에 담긴 자유분방한 모습의 엄마를 보며 이제 78세인 한 여자가 조금씩 소멸해 간다는 사실이 예전보다 덜 괴롭게 느껴진다. 늙어가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두려움을 조금은 내려놓게 됐달까. 가까이에서 엄마를 지켜보면 결코 수그러들지 않을 아름다움에 대해 믿게 된다. 엄마도, 나도, 육체와 무관하게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성이라는 것도.
OH
IN SOOK
“나의 사진은 아이들의 눈부신 웃음을 좇아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어느 날 아이들 아빠의 긴 그림자를 보면서 깊어져 갔다.” 사진가 오인숙의 책 〈서울 염소〉와 〈별일이야, 우리 가족〉은 다섯 식구의 독립 기록이기도 하다.

2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정의롭고 떳떳하게 구조조정당한 후 미련 없이 마감하고 웃으며 떠났던 가족 여행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자유롭게 해줄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평생을 회사원으로 와이셔츠 단추 한 개만 열고 다니다가 하나 더 여니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더라는 남편.
마음이 힘들 때, 글을 썼다. 순간의 해소는 되지만 상대방에게 이해받을 수는 없었다. 적나라한 활자, 폭발한 감정은 상처받은 마음을 다시 할퀼 뿐이었다. 그러나 사진은 그런 순간을 주지 않는다. 피사체에 대한 평정심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찍을 수 없으며, 상대 역시 찍는 내가 밉다면 도통 찍혀주지 않는 것이 사진이다. 교사생활을 하며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남편은 당시 전시 준비를 위해 초등학생 쌍둥이 딸을 찍던 내 프레임의 구석에 존재했다. 잘나가는 회사원이자 든든한 가장이었던 남편의 이상함을 감지한 것도 그때다. 혼자 있을 때 어떤 쓸쓸한 그림자가 보였다. 세상살이를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면서 짜증이 나기도,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매일매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그가 미웠다. 우습게도 미움은 고마움과는 별개였다. 모든 것이 막막했다. 첫 개인전을 마치고, 어느 날 바닷가에서 해안선 저 끝까지 걸어갔다 오는 남편을 봤다. ‘아, 내가 알고 있던 사람과 다르구나.’ 마침 서울과 시골을 오가는 일상을 시작하게 되면서 남편을 담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렌즈를 처음 들이밀었을 때, 남편은 얼굴을 돌렸다. 치솟는 화를 참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만 몇 년이었다. 그게 “찍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가 되고, “이렇게 빛이 좋은데 안 찍고 뭐해?”가 될 때까지 우리는 이해하고, 대화하고, 같은 시공간을 오가며 서로를 응시했다. 옥상 위 ‘다라이’에 들어가 목욕하는 남편 사진을 아내인 나 말고 누가 찍을 수 있을까? 지금은 예전처럼 열성적으로 남편을 찍지 않는다.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서로 이해가 깊어진 만큼 한 컷을 찍어도 ‘적중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진 찍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보니 어느 순간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남편이 보였다. 나 또한 내게 주어진 역할에 짓눌렸던 때도 있었다. 다 자라 독립한 아들과 딸들을 보며 식구라는 것은 서로가 잔뿌리처럼 뻗어나가고 성장할 수 있게 잡아주는 대지 같은 존재구나, 평평한 테두리인 줄 알았던 이 관계가 사실은 둥글고 입체적인 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도 나와 남편은 일상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서로를 찍어주며 재미있게 논다. 어느새 같이 할 수 있는 놀이가 된 작업이 내게 선사한 또 다른 의미와 기쁨을 꼽는다면, 이 기록이 우리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 아빠가 이런 사람이구나, 라는 걸 스스로 이해하고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둘만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뭐든,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서로가 서로를 돌봐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지금 내 안에 있다. 2014년, 〈서울 염소〉 전시에서 횡설수설 소감을 내뱉던 중 내가 했던 이 한 마디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남편 사진을 찍다 보니 내가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찍는 건 결국 나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DIANA
TAMANE
가족은 정말 영원히 끈끈하고 안정적인 관계일까? 사진을 통해 가족의 면면을 들여다본 다이애나 타메인은 확신한다. 가족 역시 끊임없는 변화와 온갖 생경함으로 요동치는 관계라는 것을.




사진 위에 증조할머니의 혈압 기록이 쓰여 있다. 메모지와 온갖 종이에 적힌 증조할머니의 혈압 기록이 모여 탄생한 ‘혈압 기록(Blood Pressure)’ 시리즈. 2016.

고향 리가로 돌아갈 때마다 의식처럼 찍곤 하는 가족사진. ‘Family Portrait’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인 이 사진 작업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2016년,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멤버 구성에 변화가 생겼다.
성인이 되자마자 유학을 떠났다. 나와 가족이 태어나고 자란 라트비아의 리가를 떠나 지난 15년간 포르투와 바르셀로나, 벨기에 겐트, 브뤼셀, 텔아비브까지 수많은 도시를 전전하며 산 것은 순전히 사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서였다. 그동안 촬영한 사진은 수없이 많지만 유독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2009년, 포트레이트 사진 수업 과제로 찍은 가족의 초상. 주제는 자유였으나 나는 엄마와 나,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함께 찍힌 가족사진을 제출했다. 할머니 집에 갔을 때 그림자 그늘 아래 서 있던 우리 넷의 눈을 우연히 한 줄기 햇빛이 훑고 지나간 그 사진. 이후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어느 순간 이유 없이 찍는 사진이 많아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할 때쯤 머릿속에 그 사진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아이디어는 처음엔 기발하게 느껴지다가 이내 시들해지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것들이 있다. 나에겐 ‘가족’이 그랬다. 특히 여자 가족 간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서로의 피부를 맞댄 장면이 유독 많은 가족사진에서 엿볼 수 있는 애착관계와 성장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피어나는 분리되고 싶은 마음 사이 그리고 연대와 경쟁 사이. 그 어느 지점을 계속해서 오가는 여자들의 관계는 정말이지 매번 새롭게 다가왔으니까. 어느 큐레이터가 언젠가 가족에 대한 내 작업에 대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이건 우리가 결코 영원히 떠나지 않을 방이다. 가끔 달아나려 해도 그저 겉돌 정도로 아주 약간만 벗어날 수 있는 세상.” 분리되고 싶을 때가 있지만 결국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자꾸만 나를 비춰보게 되는 특별한 관계. 각도를 틀고, 대상을 확대하고 축소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광경이 튀어나왔다. 겐트와 리가에서 있었던 최근 전시에서는 8년 동안 트럭 운전사로 일한 엄마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받은 영감으로 그린 그림도 함께 걸렸다. 나와 엄마,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어느새 단순한 포토그래퍼와 모델의 관계가 아닌,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공동 창작자 집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론 가족의 모든 면면을 세상에 공개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라트비아와 러시아 국경에서 꽃을 밀수입했다는 증거(실은 자신의 할아버지 무덤에 가져갈 꽃이 필요한 거였지만)인 할머니의 꽃 사진과 우리 가족이 노동자 계층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엄마의 트럭 운전 영상 스크린 샷은 때론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지나치게 사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 결함과 내(가족의) 아픈 기억, 나를 둘러싼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지점이라 믿는다. 내 기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바로 그 지점에서 위안을 얻고, 기댈 수 있기를.
HWANG
YE ZOI
정말 좋은 대화, 특별한 시선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평안한 고요 속에서 이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가 황예지가 몸을 낮춰 찍은 아빠의 흔적과 그 아래 써 내려간 아빠의 손글씨처럼.

낮은 자리에서 아빠를 찍었다. 아빠는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이런저런 말 대신 손글씨로 짧은 소감을 남겼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표현한다면 아빠는 나와 침묵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닮은 사람이다. 적당한 비관, 적당한 낙관이 있다. 아빠와 나는 부녀 관계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서로에게 가장 진실한 친구이지 않을까(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빠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가 반항을 내려놓으면서 지금 우리는 누구보다 좋은 대화를 나눈다. 사회 문제일 때도 있고 연애와 사랑, 시시한 농담일 때도 있다. 아빠가 간소하게 내뱉은 문장이 내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떠난 가족에 대해 묻자, 아빠는 “누군가가 죽으면 자궁으로, 잉태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말한 적 있다. 그다음부터 나는 작별이 그리 슬프지 않다.
셔터를 누르려고 처음 마음먹은 순간 가족 중에서 가장 순조로운 마음으로 아빠를 좋아했다. 다른 가족의 애정이 비껴나갈 때, 아빠는 나를 놓지 않고 꼭 잡고 있었다. 첫 번째 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언니를 찍기 이전부터 아빠를 찍어왔다. 엄마와 언니에겐 복잡한 감정으로 카메라를 든 반면, 아빠는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찍는다. 이 사람이 찬란해서, 이 사람과 있는 시간이 좋아서, 늙는 이 사람을 이미지로 붙잡고 싶어서.
작업이 두 사람의 관계에 미친 영향 삶을 기록하는 방법, 사진의 존재를 알려준 사람이 아빠다. 나는 아빠가 사랑했던 행위를 물려받아 이어가고 있다.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우리에게 사진은 좋은 도피처가 돼주었다. 이전에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아빠는 내가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움직일 때 가장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홍콩 민주화운동을 기록하고 돌아왔을 때, 내가 배움이 부족한 것 같다고 하니 고생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더 배우라고 했다. 그 강단이 좋았다.
이 작업을 보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느끼길 바라나 이 사진들은 아빠가 나약해 보이기 시작할 때, 아빠의 흔적을 들춰보며 작업한 사진이다. 올려다봐야 시선이 맞았던 아빠가 자꾸 작아지고 낮아지는 게 속상했다. 딸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아빠의 지난 시간을 들여다보니 뜨겁게 산 사람이었고, 이제는 꽤 지친 사람이었다. 가장으로서 책무를 덜어내고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느꼈다. 아빠는 조용히 사진을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 나의 가장 큰 곤란함, 신체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