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가만히 살펴봐도 30년 넘게 일하고 있는 여성이 별로 없다. 그래서일까. 한결같이 다정하고 유쾌한 자세로 일하는 박미선을 보면 어쩐지 뭉클해진다. 개그우먼, MC 그리고 유튜버로. 시대의 변화를 자신의 인생으로 만들어버리는 박미선은 이제 우리를 향해 나아간다.
〈1호가 될 순 없어〉 〈모란봉 클럽〉 〈나의 판타집〉을 진행하고, SK브로드밴드와 전국을 다니면서 촬영하고 있어요. 시간 날 때마다 유튜브 채널 〈미선임파서블〉도 촬영하고, 정말 시간이 빌 때는 또 다른 유튜브 채널 〈나는 박미선〉을 찍고요. 부모님이 연세가 있으시니 모시고 병원도 다녀야 하고, 아들이 복학하니 그것도 신경 써야 해요. 우리 세대가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일하랴 집안 식구들 챙기랴 정신이 없어요.
〈나는 박미선〉까지 촬영할 에너지가 있다는 게 대단하네요
옛날에 비하면 에너지를 반도 안 쓰는 거예요. 10년 넘게 함께 일하는 스태프가 나자빠질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일했어요. 그래도 멀쩡했어요. 완전히 슈퍼우먼이었어요. 사람들이 ‘그 돈 벌어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었지만 돈은 쓸 데가 많아요. 그렇지 않아요(웃음)?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입방정을 떤 덕분이에요(웃음). 예전에 월드비전이랑 아프리카를 네 번 갔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오히려 제가 치유받고 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유튜브 해서 번 돈으로 아이들을 도와줄까?’ 했는데 매니저가 너무 좋은 생각이라더군요. 제 이미지를 좋게 봐주는 광고주도 있고, 영상을 구독해 주는 ‘요원들’도 생겼어요. 대성공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성과가 나쁘지 않아요. 당장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기엔 시기적인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국내 아동이 먼저인 것 같아서 아이들 집수리비와 난방비에 보탰어요. 너무 추운 겨울이었잖아요.
삶의 목표가 ‘나’보다 ‘우리’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50세에 은퇴하고 다른 일을 하려고 했어요. 여행 다니면서 여행작가로 일하거나 미술사를 공부해서 도슨트가 되려고 했죠. 그림을 좋아하고, 말하는 것도 잘하니까 설명하는 쪽으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학교도 알아봤는데,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내가 잘하는 게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거잖아요. 이 일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펼치면 좋겠다 싶었죠. 조용히 하려다가 이 일이 누군가에게 영감이 돼 다른 선한 일들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대놓고 좋은 일 하라고 얘기해요. “네가 잘되면 그걸로 대놓고 좋은 일을 해봐. 그게 연결되고 연결돼서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날 거야”라고요.
개그우먼 박미선이 계속해서 현역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여성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임감을 많이 느껴요.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잖아요. 후배들이 그 길을 따라올 수 있다고 상상하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누군가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없다고 그랬어요. 프리랜서 세계에서 선후배가 어디 있어요. 저는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요. “너희가 나를 이겨야 돼. 우리는 서로 경쟁자야.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너희도 열심히 해.” 그리고 그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저 선배를 이겨야지. 내가 올라가야지.’
〈1호가 될 순 없어〉가 개그계의 근현대사 같기도 하더라고요. 박미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과거와 현재의 개그맨들이 뒤섞여 다 같이 희극인실에 앉아있는 것 같아요. 개그맨들은 보통 예능에 나가면 다른 게스트를 받쳐 주기 위해서, 재미있게 살려 주기 위해서 우리를 희생해요. 재미없어도 웃어주고 멋있다고 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1호가 될 순 없어〉에서는 그런 게 없어도 되잖아요. 우리끼리 노는 것 같아요. 프로그램 자체가 시트콤 같은 느낌이잖아요. 이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가 〈세바퀴〉를 만든 분인데요. 저랑 같이 프로그램 처음에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다 같이 모여서 옛날 〈세바퀴〉처럼 노크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누가 이혼하게 되면 빨리 〈2호가 될 순 없어〉로 제목 바꾸고 시즌2로 가자고(웃음). 그런데 웃긴 건 프로그램 나오고 나서, 다들 굉장히 조심한다는 거예요. 진짜로 1호가 되면 안 되니까.
예능 프로그램은 ‘케미’를 보고 캐스팅하잖아요. 미디어가 박미선에게 원하는 역할이 뭘까요
예전에는 남편 때문에 속상한 아줌마 캐릭터로 소비됐어요. 신세 한탄하는 주책맞은 아줌마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제 목소리를 내고 의견을 얘기하는 역할을 하게 됐죠. 아마도 〈까칠남녀〉 와 〈거리의 만찬〉을 통해 제 이미지가 바뀐 것 같아요 〈나의 판타집〉에서도 현실적인 조언을 하거든요.
단순히 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에요. 제작진한테도 그랬어요. 사람들이 왜 이런 집을 원하는지 그 이야기가 중요하다고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서 원하는 집이 달라지거든요. 어떤 집을 환상적으로 여긴다는 건 지금 나의 결핍과 로망이 반영된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 보면 조금 안타까워요. 아이돌처럼 어린 친구들도 너무 많이 지쳐있더라고요. 다들 자기가 원하는 집에 가면, 너무나 푹 잔다고 해요. 게스트들이 ‘오랜만에 코 골면서 푹 자본 건 처음이에요’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보다 보면 마음이 아파요. ‘아이고, 다들 갈 길이 멀었는데. 20대 청춘들이 이렇게나 지쳐있다니 참 안 됐다’ 이런 마음이 좀 들어요. 방송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런 멘트들이 나오나 봐요.
젊은 사람들이랑 일하는 게 굉장히 즐겁다고도 말했죠
에너지 때문이죠. 좋은 에너지와 열정. 이제 우리에겐 그런 게 없어요. 너무 기계 같아요, 방송 기계. 프로그램의 포인트, 작가들이 원하는 멘트, 어떻게 해야 방송에 많이 나오는지 딱 보면 알아요. 35년째 이 일을 하는데 ‘무당 빤스’죠. 방송 대본도 한 번 보고, ‘ 오케이, 가’ 그러면 끝나니까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가진 반짝반짝한 게 너무 좋아요. ‘그래, 그거 재미있겠다!’ 하면서 따라갈 수 있는 거죠.
저는 잘 돌아보지 않아요. 이미 지난 거 생각해서 뭐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일한 시간이 35년이 아니라 3.5년 같아요. 자꾸 뒤돌아보면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잖아요. 항상 ‘앞으로 뭐 하지? 다음 달에 뭐 하지?’해요. ‘그때 그렇게 할걸’ 후회하지 않고 다가올 일 만 생각해요. 모든 시간이 다 만족스럽다면 거짓말이겠죠.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고, 잘못한 부문도 정말 많지만 이미 생긴 상처는 아물게 두고 또 다른 상처를 맞이해야죠. 계속 그 안에 있으면 못 살잖아요.
건강했으면 좋겠고, 좋은 에너지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넉넉하게 포용할 수 있는 좋은 어른이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저 사람의 그늘에 나도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스스로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고, 머물러 있지 않는 게 목표예요.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놀지는 않을 거예요. 끊임없이 뭔가를 할 거예요. 당장 내일 죽어도 후회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