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빈티지 러버'가 환경운동가가 될 수 있다? #ELLE그린

취향과 소신 사이.

BYELLE2021.04.01
 
 
20대의 끝자락이 돼서야 난생처음 만든 버킷 리스트에 이런 항목이 있었다. ‘생필품을 제외하고 한 달에 3개 이내의 물건을 구매할 것. 그리고 그걸 전부 기록할 것.’한 해가 시작된 지 세달 남짓한 시간이 흐른 지금 총 여섯 개의 물건이 리스트에 올라 있는데 목록은 대강 이렇다. 룰루레몬 요가 매트와 빈티지 식기 편집 숍에서 구입한 1960년대 컵 & 소서. 영화 〈파이트 클럽〉 속 브래드 피트의 스타일에 ‘꽂혀’ 산 벨스타프 라이더 재킷과 아르마니 익스체인지의 새빨간 셔츠(전부 빈티지다) 등등. 불필요한 지출을 막겠다는 각오와 이왕이면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건만 품 안에 들이겠다는 다짐을 앞세운 결과, 가장 자주 찾게 된 품목은 빈티지였다. 독보적인 오리지널리티와 탄탄한 내구성을 갖춘 빈티지 제품이야말로 한정된 물건을 들여야 할 때 찾게 되는 가장 믿음직한 선택지였으니까. 게다가 빈티지를 구매하는 건 곧 의식적인 소비를 뜻하기도 했다. 빈티지 옷 한 벌을 사면서 은연중에 드는 ‘버려질 옷 하나를 구제했다’는 생각, SPA 브랜드 매장 앞을 주저없이 지나치며 느낀 뿌듯함은 세상을 위해서도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빈티지 패션은 지속 가능한 패션의 좋은 예다. ‘지속 가능한 패션 디자인의 사례’를 연구한 국내 논문에 따르면 기존의 섬유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형태의 옷을 탄생시키는 ‘리디자인 패션’, 레이온과 폴리에스테르, PVC 등 오염 물질을 방출하는 합성 소재를 거부하고, 유기농 리넨이나 옥수수섬유 등 환경친화 소재를 애용하는 ‘오가닉 패션’, 인조 모피와 비건 레더를 아우르는 ‘비건 패션’과 함께 빈티지 패션은 지속 가능한 패션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심지어 번개장터나 당근마켓 같은 중고 거래 플랫폼을 수시로 드나드는 MZ 세대가 전면에 나서서 이끌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나만의 취향을 바탕으로 소소한 빈티지 숍을 열거나 입던 옷을 버리는 대신 누군가에게 적당한 가격에 내어주는 식으로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으니까. 의식적인 소비보다 신소재 개발이나 제조공정 혁신 등 의식적인 ‘생산’이 주체가 돼야 하는 다른 지속 가능한 패션과 차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지금은 빈티지 물결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센 때다. 동묘와 광장시장이 ‘빈티지 성지’로 불린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 SNS는 남다른 큐레이션을 자랑하는 빈티지 숍부터 독보적인 취향으로 ‘셀렉한’ 아이템을 소개하는 개인 빈티지 마켓까지 운영 방식도, 취급하는 품목도, 취향도 제각각인 가게로 넘친다. 2018년을 기점으로 벨라 하디드와 블랙핑크 제니, 리사 같은 ‘슈퍼’ 셀러브리티가 스스로 ‘빈티지 러버’임을 선언했고, LP와 고전 게임이 부흥시킨 레트로 인기까지 더해지면서 빈티지 패션은 ‘뉴트로’ 룩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어느새 지구상의 가장 트렌디한 패션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나 또한 이런 흐름에 안착해 있기는 마찬가지. 현재까지 팔로 중인 인스타그램 계정 중 빈티지를 소개하는 계정은 약 40여 개. 여기에 종종 드나드는 중고 거래 앱과 다른 사람이 소유한 옷을 들여와 소개하는 ‘Pre-owned’ 라인을 갖춘 럭셔리 온라인 편집 숍까지 포함하면 일상적으로 찾는 빈티지 마켓의 수는 훨씬 늘어난다. 심지어 빈티지 패션에 머물러 있던 관심이 식기나 오브제, 가구까지 이어지면서 내 삶 전반에 빈티지가 차지하는 영역은 무서운 기세로 확장 중이다. 
 
이러한 빈티지 열풍은 업사이클링 라인 론칭이나 신소재 개발을 기웃거리던 패션 업계의 이목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했다. 세계 최대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 ‘더리얼리얼’에 중고 상품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구찌와 개인이 소유한 명품 의류와 액세서리를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연 셀프리지 백화점. 여기에 앞다투어 리셀 스토어를 구축하기 시작한 H&M, ASOS, COS 같은 패스트 패션 업계까지 온갖 패션 브랜드와 플랫폼이 이 열풍에 합류했다. 성별과 연령대, 소비수준을 고려했을 때 가장 폭넓은 소비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루트가 빈티지 시장임을 감지한 것. 특히 MZ세대를 정조준한 상태로 전진 중인 패션 업계의 움직임은 ‘빈티지가 미래의 패션’이라는 예측에 힘을 실어주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국내 패션 업계의 움직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먼저 나선 대규모 소매점은 현대백화점. 중고 제품 중 하이엔드 컬렉션에 집중하는 패션 플랫폼 ‘어플릭시’에 팝업 스토어 입점을 제안하더니 최근 여의도에 등장한 ‘더 현대 서울’에 번개장터의 첫 번째 오프라인 공간 ‘BGZT Lab’을 선보였다. 이 모든 흐름은 “2024년에는 중고시장의 규모가 지금의 두 배가 넘는 약 71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확신한 세계 최대 빈티지 의류 유통업체 ‘스레드업’의 전망과 맞아떨어진다.  
 
빈티지는 과연 우리의 미래일까? 빈티지 패션과 업사이클링 패션의 경계에서 빈티지 의류를 적극적으로 재활용해 선보이는 독자적인 패션 브랜드의 활약을 보면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희귀한 빈티지 직물을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옷을 디자인하는 남성 패션 브랜드 보디(Bode)가 가장 대표적인 예. 알록달록한 빈티지 원단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성과 중성적인 디자인으로 보디는 2017년, 첫 컬렉션을 공개하자마자 ‘뉴욕 패션의 미래’라는 수식어를 거머쥐었다. 빈티지 리바이스 데님을 오려 붙여 현대적 감성을 장착한 고품질 데님으로 탈바꿈시키는 리던(Re/Done) 역시 셀러브리티들의 꾸준한 애정 속에서 승승장구 중인 업사이클링 브랜드. 환경 피해를 최소화한 독자적인 의류 공급 시스템을 통해(실체는 비밀이지만) 들여온 빈티지 옷을 맞춤복 형태로 조합하고, 스타일링해 선보이는 패션 플랫폼 베터(Better)처럼 보다 정교하고 의식적인 빈티지 패션을 전개하는 크고 작은 브랜드 역시 속속 등장하며 빈티지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빈티지는 거대하면서도 촘촘하게 설계된 굳건한 파라다이스를 건설하는 중이다. 게다가 이 왕국의 전망은 꽤나 밝다. 단순히 ‘오래된 멋’을 찬미하는 데 집중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 우리를 둘러싼 빈티지 패션은 업사이클링과 비건 패션, 오가닉 패션과 손을 맞잡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으레 돌아온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빈티지 시대를 열었다. 빈티지는 이제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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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류가영
  • 웹디자이너/ 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