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사라짐의 유혹 앞에서 #ELLE보이스

한 달에 200만 원씩 쓴다면 지금 가진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BYELLE2020.12.18
‘한 달에 200만 원씩 쓴다면 지금 가진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몇 년 전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볼 때마다 나는 몰래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 달에 100만 원씩 쓴다면?’ 생명 연장을 위해 월 지출액을 줄여 계산하면 어쩐지 기분이 더 나빠졌다. 꼼꼼하게 커튼을 치고 소파에 몸을 파묻으면 꼭 관 속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손을 뻗어 티 테이블 위에 놓아둔 외과의사 아툴 가완디의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집어 든다. 나는 내가 알맞게 제조한 공포에 아득하게 취한다.

 
첫 책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런 상태는 비로소 뜸해졌다. 사석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자 30대인 후배가 깜짝 놀랐다. “저도 이 돈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계산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지역 북 토크 자리에서 같은 얘기를 꺼냈다. 거기서도 유사한 경험을 가진 이가 여럿이었다. 인간에게 그토록 복잡한 층위가 있다면서 왜 여자들은 품고 있는 공포나 상상하는 죽음조차 비슷한 걸까. 왜 소동도, 가해도 없이 혼자 조용히 사라지고 싶어 하는 걸까.
 
뉴스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한국 여성의 자살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1% 증가했다고 한다. 그중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43% 폭증했다. 재해는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여파는 여성에게 더 잔인하다. 실제로 코로나로 인한 여성 실업률은 남성의 2배. 3월 한 달 만에 20대 여성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타격이 큰 여행업과 외식업,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주로 젊은 여성인 탓이다. 며칠 전에는 무급 휴직이 길어지는 것을 비관한 어느 20대 항공사 승무원이 생을 마감했다. 나 역시 외부 행사가 끊긴 데다 봄에는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 확산으로 카페에 찾아오는 발길이 줄어드는 경험을 했다. 이렇게 일상이, 생계가 불안한데 서울 아파트값은 이제 10억 원이 우습다. 인스타그램은 아랑곳없이 12월의 마지막 밤에 성냥팔이 소녀가 들여다보던 창문처럼 환하게 타인의 행복을 밝히고 있다.
 
미국 시인이자 페미니즘 사상가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제인 에어〉를 분석한 글에서 가부장제 속 여성이 전통적으로 겪게 되는 유혹에 대해 말했다. 어머니도, 경제적인 힘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 제인 에어는 먼저 무기력한 피해자성과 분노를 폭발시켜 더 큰 벌을 불러오는 히스테리라는 두 가지 상반된 유혹과 마주한다. 자선 학교에서 공개적 수모를 당한 후 제인이 겪는 유혹은 자기혐오와 자기희생이다. 자기혐오와 쌍을 이루는 여성의 자기희생에는 ‘사라짐’, 즉 수동적 자살의 유혹도 포함된다. 가정교사가 된 제인은 집주인 로체스터를 만나 낭만적 사랑과 굴복의 유혹, 남자의 대의명분이나 경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유혹에 차례로 맞닥뜨린다. 리치는 낭만적 사랑과 굴복의 유혹이야말로 여성적 조건의 핵심 유혹이라고 봤다. 나 또한 동의한다. 그러나 경제 위기에 기후 위기, 전염병 위기까지 더해진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 삶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우울감이 낭만에 대한 기대감을 압도하는 형세다. 그릴 수 없는 미래, 지나치게 극적으로 상상 가능한 미래에 대한 공포는 여성이 선제적 자기방어로서 자기희생을 선택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사라짐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무엇이 까마득한 공포로부터 나를 붙들어 맬 밧줄이 될 수 있을까?
 
죽음은 철저히 개인적 경험이지만 권력도, 경제력도 없는 젊은 여성들이 느끼는 죽음의 유혹만큼은 분명 집단적 경험이다. 이 뒤에는 제대로 된 일자리와 자립의 기회를 내어주지 않는 사회구조의 폭력이 숨어 있다. 부디 깨달아주길 바란다. 나를 둘러싼 고통이 결코 내 개인의 부족함과 잘못, 불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은 유혹 역시 나만의 것이 아닌 많은 여성의 공통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사법부의 불법 촬영 편파 판결에 항의하며 ‘한 명의 자매도 더 잃을 수 없다’고 부르짖던 외침을 기억한다면, 어떤 자살은 명백한 학살이라는 통찰을 공유한다면 당신은 분명 같은 유혹에 흔들리는 당신 옆의 여성을 붙잡아주려 할 것이다. 당신 스스로가 단단한 밧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나의 투쟁이 곧 여성 보편의 투쟁임을 깨달은 내가 그랬듯이.
 
김진아_ 한남동에 자리한 울프소셜클럽 대표. 책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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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사진 UNSPLASH
  • 디자인 김려은
  • 기사등록 온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