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반대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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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반대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여성과 성 소수자 인권, 인종 차별 문제에 끊임없이 반대 의견을 제시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의 죽음 이후 돌이켜보는 대화들.

ELLE BY ELLE 2020.10.29
 
2020년 9월 18일 미국 연방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세상을 떠났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자 독보적인 진보 아이콘이다. 법원에서 성별(Sex)이 아닌 사회적 성(Gender)을 최초로 언급했으며, “나는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고 편견을 깨는 예의 바른 독설가이자 ‘스웨그’ 넘치는 명언 제조기였다. 성차별이 남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법과 인식을 바꾸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세상은 분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등장 이후 달라졌다. 그의 돌연한 죽음을 애도하며 2014년 〈엘르〉 미국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꺼내본다.
 
1973년 당신의 첫 변론을 기억해요. 남성 공군과 달리 여성 공군은 남편을 부양하고 있음을 증명해야만 주거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죠 당시 같은 또래의 판사 남성들은 인종 차별은 이해했지만 성차별에 대해서는 약간 무지했어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이 공부했기에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했죠. 나는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법정에서 할 거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내 말을 들어야 하는 청중이라고 믿었어요.

일종의 선생님이었군요 그렇죠. 그들은 자신을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했어요. 여성에게도 호의를 베푼다고 믿었죠. 그 친절이 오히려 여성을 가두는 철창과 같다는 걸 이해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70년대에 제가 맡은 모든 케이스에서의 임무였어요. 여성을 보호하겠다고 만든 법이 오히려 여성의 기회를 제한하고 있다는 걸 이해시키려 애썼죠. 나는 그들의 딸과 손녀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상상하게 하려고 했어요.

확실히 과거보다 여성 인권 재판이 많아졌어요 릴리 레드베터 사건 얘기를 해볼까요. 릴리는 남성으로 가득한 타이어 회사에서 일하는 첫 번째 여성이었어요. 동일한 직책을 가진 남성보다 적은 돈을 받았죠. 10~15년 뒤에 이 문제로 재판을 하자마자 사람들은 피해 여성이 왜 이제야 고소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릴리가 승소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됐을 때는 너무 늦게 소송을 제기한 것이 문제가 되는 거죠. 
 
만약 임금 차별 문제를 더 일찍 소송했다면 어땠을까요 회사는 분명 ‘당신이 남성만큼 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돈을 덜 받는 것’이라고 했겠죠. 지금 소송했기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어요. 이제 회사는 ‘여성인 네가 남성보다 일을 못해서 임금을 적게 받는다’고 변명할 수 없게 된 거죠. 일단 그 변론이 제거되고 나니, 사측은 “아, 미안. 그런데 당신 너무 늦게 고소했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임신 중절 합법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금 임신 중절 합법화 운동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젊은 여성들이 낙태가 필요하다면 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 조항은 가난한 여성에게 큰 문제가 돼요. 보통 여성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주가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주로 이동해 수술을 받을 수 있어요. 특정 주에서만 가능했던 옛날의 이혼 제도와 비슷한 느낌인 거죠. 미국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봐야 해요. 이 법이 다른 주로 여행할 여력이 있는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임을 알아차려야 해요. 이 제약은 오직 가난한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걸 깨달을 때 비로소 모든 여성의 임신 중절 접근권에 대한 이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법 조항에 대한 입체적인 의견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깊이 생각해 봐야 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출산을 장려하는 국가 정책은 말이 안 되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표현의 자유에 제약이 있던 시절의 법원은 인종 차별적인 판결을 내렸어요. 그때 나왔던 반대 의견을 읽어보면 오늘날 의심할 여지 없는 미국의 법 조항 중 하나가 됐어요. 저는 장기적 관점에서 제 반대 의견이 법원의 입장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젊은 여성 중 일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걸 꺼리기도 해요 저는 그들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스트란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장벽 없이 열망하고, 성취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에요. 남성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고요. 남성과 여성 모두 동등한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죠. 
 
남편 마틴 긴즈버그에 관해서도 묻고 싶어요. 그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제가 17세 때 마티를 만났어요. 그는 제가 똑똑한 것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유일한 소년이었죠. 50년대에는 똑똑한 여성들이 자신보다 남성이 더 돋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매우 슬픈 일이었죠. 마티는 항상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었어요. 그는 너무 자신만만해서 결코 저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 경력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고 했죠. 
 
당시 미국에는 가족의 주거지를 남편이 선택하고, 여성은 남편을 따를 의무가 있었어요 1980년 제가 워싱턴 D.C. 최고법원으로 발령받았을 때 너무 많은 사람이 “출퇴근하는 게 힘들겠다”며 저를 안쓰러워했어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죠.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마티는 당연히 저와 함께 워싱턴 D.C.로 이사했어요. 한번은 그와 함께 행사장에 참석했을 때 안내자들이 자연스럽게 남편 마티를 긴즈버그 판사로 소개했어요. 연방법원에는 여전히 여성이 매우 드물어요. 그때마다 마티는 “이 사람이 판사입니다”라고 정정해야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권위 있는’ ‘여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요 저는 제 자신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권위는 바로 이 자리이며, 제가 발표할 의견을 열심히 준비하는 게 사람들의 존경심을 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도 당신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과 마주쳤어요 당신도 사진가를 데려왔잖아요. 저는 81세예요. 그런데 아직도 사람들이 내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죠.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는 게 이 나라에 큰 변화를 줄 거라고 믿나요 어쩔 수 없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내가 살아 있을 때 그 일이 벌어지는 걸 보고 싶어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끝끝내 여성 대통령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반대 의견은 이미 우리를 바꿔놓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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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JESSICA WEISBERG
    에디터 김초혜
    사진 GETTYIMAGESKOREA
    디자인 이소정
    기사 등록 온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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