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주자는 벨루티의 크리스 반 아셰. 지난 7월 10일, 그는 디지털 파리 패션위크의 일환으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10분 남짓한 영상 한 편을 공개했다. 영상 속의 그는 미국의 세라믹 아티스트 브라이언 로슈포트와 영상통화를 하며 컬렉션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는다. 이 대화에서 크리스 반 아셰는 “전통적인 패션쇼에서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쇼를 잠시 멈추고, 이 디자인의 영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설명하는 일”이라며 영상을 제작한 계기를 밝혔다. 이윽고 영상은 브라이언 로슈포트의 작업실과 크리스 반 아셰의 아틀리에를 번갈아 비추며 세라믹 작품이 컬렉션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아이디어의 출발점부터 디자이너가 강조하고 싶은 지점(세라믹 작품의 컬러와 질감 대비를 화려한 프린트로 구현해 냈다), 최종 단계에서 한 벌의 옷이 모델에게 입혀지는 순간까지. 하나의 컬렉션이 완성되는 과정을 10분 남짓한 영상에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뒤이어 디올 맨의 킴 존스 역시 아티스트와 협업한 필름을 공개했다.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영상은 현재 가장 주목받는 현대미술 작가이자 가나의 아티스트, 아모아코 보아포와의 작업을 담았다. 가나의 작업실에서 시작하는 영상은 아모아코 보아포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손가락 끝을 이용해 직접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을 느리고 웅장하게 담았다.
곧이어 영상은 킴 존스의 파트로 넘어간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자랐기 때문에 언젠가 한 번쯤 아프리카 아티스트와 작업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아모아코 보아포의 작품을 정말 좋아할 뿐 아니라, 아프리카 예술 자체가 나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컬렉션의 핵심 컨셉트를 짚어준다. 이후 영상은 보아포의 초상화 작품과 킴 존스의 2021 S/S 컬렉션을 빠르게 교차 편집하면서 평면 그림이 어떻게 입체 룩이 되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끝이 난다. 메종 마르지엘라를 이끄는 존 갈리아노는 영국의 포토그래퍼 닉 나이트와 함께 아티즈널 컬렉션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했다. 마치 한 편의 인터넷 강의를 보는 것처럼 친절한 설명이 특징인 이 영상의 러닝 타임은 무려 50분이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의 영상을 보며 존 갈리아노가 자신이 처음 영감받은 순간을 설명하고, 이후 개발 팀과 디자인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까지 모두 실었다. 여기에 중간중간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곁들여 컬렉션 전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그를 보면 강의실에 선 교수님 같은 포스가 느껴질 정도.
능숙한 언변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온전히 설명한 존 갈리아노가 있는 반면,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카메라 앞에 선 인물도 있다. 바로 릭 오웬스다. 7월 11일에 공개된 릭 오웬스의 2021 S/S 멘즈웨어 영상에는 릭 오웬스와 모델, 단 두 사람만 등장한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직접 모델에게 옷을 입혀주고, 친히 무릎을 굽혀 룩북 사진을 찍는 일을 반복한다. 릭 오웬스는 한 인터뷰를 통해 “스펙터클한 이벤트를 하기엔 시점이 좋지 않다. 대신 내가 실제로 작업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가장 진심 어린 소통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토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발테르 키아포니도 릭 오웬스의 생각에 동의한 듯하다.
그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비디오 〈Inside Tod’s Studio〉를 통해 토즈 본사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현장감 있는 영상으로 담아냈다. 비디오는 발테르 키아포니가 출근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며, 그의 동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토즈 본사 곳곳에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와 아틀리에, 장인들이 손끝으로 컬렉션을 만들어내는 작업실에까지 이른다. 영상 곳곳에서 카메라는 컬렉션의 무드보드, 러프한 드로잉, 제품의 초기 모형들을 비추기도 하며, 장인들이 가죽을 커팅하고 바느질하는 모습까지 모든 순간을 포착했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역시 감추거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작업을 공개하는 12시간 라이브 스트리밍, ‘구찌 에필로그’ 컬렉션을 진행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웅장한 궁전 분위기의 ‘팔라초 사케티’에서 촬영한 이 필름은 미켈레가 자신의 영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물론, 구찌의 하우스 디자이너와 스태프들이 직접 모델이 되어 의상을 착용하고, 룩북을 촬영하는 전 과정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미켈레는 팬데믹 시대 이전, 패션 세계가 유지해 온 규칙과 역할, 기능에 의문을 던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디자이너가 스스로 모델이 된 사례도 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코로나로 인해 런던 시 전체가 셧다운된 상황을 뚫고 캠페인을 촬영하기 위해 모델을 자청했다. 포토그래퍼는 남편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안드레아스 크론텔러가 맡았고, 촬영 장소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아틀리에였다. 그야말로 브랜드를 이끄는 두 사람이 컬렉션의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히 만들어낸 셈.
이렇듯 코로나 시대의 디자이너들은 적극적으로 대중 앞에 나와 목소리를 내거나, 자신의 작업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고, 때로는 직접 모델이 되기까지 하면서 사람들과 더욱 열정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디자이너의 존재가 ‘언택트’ 시대를 맞아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로 변모하고 있는 것.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노력이 반갑게 느껴지지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