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2020년식 업데이트 #ELLE 보이스

'노력파 꼰대'라고 스스로를 설명하는 일.

BYELLE2020.10.11

2020년식 업데이트

“많이 낭비해 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20대 때는 돈이 없으니까 주로 시간을 많이 들였죠. 시행착오를 겪으며 안 맞는 것들을 곁에 두기도 하고 또 흘려보내면서 그제야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어떻게 좋은 취향을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답해오곤 했다(내가 딱히 좋은 취향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며 만족스럽게 살고 있으니까 ‘취향’ 자리에 ‘가치관’ 같은 걸 대입할 수도 있겠다. 어느 서점 행사 뒤풀이 자리에서도 처음 만난 95년생 신입사원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아 비슷하게 답했다(나는 95학번이다. 세상에!). 그 말을 듣자 같은 자리에 있던 88년생이 이렇게 반박해 왔다(95년생과 95학번 중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요즘 젊은이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곧 돈이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스펙 한 줄이라도 더 만들기 위한 활동으로 바쁜 20대에게는 시간도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할 자원이며, 돈 못지않게 시간에도 늘 궁핍하다는 얘기였다. 물정 모르고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었구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언니의 충고’ 같은 걸 원래도 닭살 돋아 하는 성격이지만, 20대들과 내가 인식하는 현실 자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니 더 적극적으로 입 다물게 된다. 누군가 조언을 구해서 도움이 될 만한 말을 골라볼 때도 자기검열의 필터가 작동한다. 힘들어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눈치 없는 파이팅이나 외치는 건 아닌가? 문제를 헛짚고 뜬구름을 잡고 있진 않나? 지금 많은 것을 가진 안정적인 중년이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진 게 없다고 여겼던 내 20대조차도 지금 상황보다 나았다는 걸 점점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단단하게 밟고 설 수 있었지만 지금 흔들리는 기반을 요약하자면 ‘세상이 점점 나아진다’는 감각이다. 기성세대의 특권의식만큼이나 90년대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에 배어 있을지도 모를 나이브한 낙관을 경계하게 된다.
나를 포함한 지난 세대에게서 멘토를 찾기 어려운 시대다. 변화가 거의 없는 농경사회에서 노인들을 살아 있는 빅 데이터로 활용할 때는 늙음이 지혜와 동일시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20년 같은 전무후무한 혼란의 시대에 어떤 경험이나 노하우가 통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져보면 회의적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라고 이런 저성장, 경기침체, 팬데믹, 양극화, 기후위기를 겪어봐서 해법을 알까? 오히려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관성에 젖은 대응을 하다가 망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 기존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변화의 시기에 적응이라는 관점에서는 더 오래 산 사람 가운데 이상적인 롤모델을 찾아 닮고자 하기보다 더 어린 사람들을 다양한 레퍼런스로 삼아 참조하는 게 맞을 듯하다.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충고를 아끼는 대신 어린 사람들에게 자주 묻거나 그들의 방식을 관찰하는 건 헛발질하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다. 인터뷰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런 면에서 행운이다. 올해는 카카오페이지와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뤄온 10명의 여성을 만나는 〈멋있으면 다 언니〉라는 인터뷰를 연재하고 있는데, 인터뷰이들에게 일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듣는 동안 많은 걸 느끼게 된다.  그들은 가르치려는 뜻 없이 생각과 경험을 나눠주지만 나는 확실히 배운다.
이수정 교수 같은 어른에게서도 물론 배운다. 나이가 많은 선생님이라서가 아니라 전문성을 가지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현안에 대해 단호한 발언과 제안을 쉬지 않는, 최전선에 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작가처럼 내가 상상해 보지 못한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는 90년대생의 추진력에서도 배운다. 잡지사에 공채 시험을 보고 입사한 나에게 자기 이름을 걸고 일간 구독 메일링을 시작한 그의 사례는 놀랍도록 용감하고 능동적으로 다가온다. 나를 드러내는 걸 지독하게 꺼렸던 회사생활을 뒤로하고, 프리랜서 생활 2년 차에 접어들면서 개인이 매체가 되는 흐름을 쫓아가며 이슬아 작가의 선례에 더 감탄하게 된다. 유튜브 채널 〈박막례 할머니〉의 김유라 PD는 공모전에 수십 번 참가했던 이유를 묻자 “내 눈에는 내가 만든 영상이 가장 재미있어서”라고 답했다. 기준과 동력이 철저하게 자기 안에 있었다.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인 전주연 바리스타는 회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데 대해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해낸 일”이라고 말했다. 조직에 충성심과 애착을 갖고 있으면서도 대등한 관계 인식이 산뜻했다. 일하는 분야가 각기 다르지만 이들에게서 외부 권위나 평가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동기부여하는 자발성, 환경이 완벽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단 해보는 실행력,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고 수정하는 유연함과 회복탄력성을 공통적으로 발견한다. 한 방향을 보고 받아쓰는 식으로 학습하기보다 전후좌우를 살피며 서로 새로운 정보와 노멀을 ‘업데이트’ 하는 방식이 이 시대에 어울리는 배움이 아닐까? 그게 안 돼서 버티다가 몰락하는 사례를 우리는 나이 든 권력자 남성들에게서 많이 보고 있다. 전주연 바리스타는 인터뷰에서 ‘노력파 꼰대’라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스스로 꼰대라는 걸 알고 그러지 않으려 애쓴다는 뜻이다. 나 역시 새겨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황선우〈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애호가.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하며 쌓아온 경험을 살려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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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이마루
  • 디자인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