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나의 과학책 탐독기 #ELLE 보이스

이 시기를 견디는 힘에 대하여.

BYELLE2020.10.10
 

나의 과학책 탐독기

지난해 연말까지 내 주간 일정 중 하나는 과학책 신간을 살피는 일이었다. 온라인 서점의 ‘분야 보기’ 탭으로 들어가 과학란의 ‘도서 모두 보기’를 클릭한 다음, 출간일순으로 정렬하고, 지난 일주일 동안 출간된 과학책들을 확인해 본다. 그런데 여기 함정이 하나 있다. 수많은 전공 서적과 교재, 전문서, 연구소의 전략보고서, 심지어 권당 수십만 원쯤 하는 연감들도 모두 과학책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두 권 이상 발견했다면 그 주는 성공적이었다. 이런 수고를 들인 이유는 당시 되도록이면 신간을 소개해 달라는 조건으로 신문에 과학책 서평을 격주로 연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격주 마감쯤이야 얼마든지!’ 하는 마음으로 수락했는데 그 격주가 어찌나 빨리 돌아오던지, 돌이켜보면 늘 책상 위에는 읽어야 할 과학책들이 쌓여 있었고 자투리 시간마다 책을 펼쳐보기에 급급했다. 그래도 나는 늘 책탑에 둘러싸인, 특히 과학책에 둘러싸인 일상을 꽤 좋아했다. ●
어린 시절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를 고등학교 이과, 자연과학 학부, 생화학 대학원이라는 루트로 이끈 건 8할이 과학책이었다. 북 토크를 하면 “이공계 전공인데 어떻게 글을 쓸 생각을 하셨어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사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과학자가 아주 많아서 그들은 과학으로 오는 길목을 지키고 선 채 많은 청소년을 과학의 세계로 현혹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과에 가기로 결정한 이후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소년들도 있지만, 반대 순서로 〈코스모스〉에 홀려 과학을 배우기로 결심하는 소녀들도 있다는 이야기다. 내 경우는 후자였다. 수업시간에 주기율표를 처음 배우며 느꼈던 가벼운 호기심은 소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던 학교 도서관의 과학책 서가에서 증폭됐다. 하지만 그 몇 안 되는 책 속에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칙과 그 원칙을 탐구하는 학자들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우주와 원자, 천문학적 시간과 진화의 시간을 오가며 인간 바깥의 시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오래된 책장을 살펴보면 10대의 내가 어떤 책들에 어떻게 매료되어 있었는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처럼 과학자들이 쓴 책도 좋아했지만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이나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같은 저널리스트들이 쓴 논픽션도 좋아했다. ‘하리하라’라는 닉네임으로 익숙한 이은희 작가의 책도 여러 권 꽂혀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웠던 10대 시절, 책장의 과학책들은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살펴봐. 세계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칙이 있으니까.’ 물론 지금은 과학이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과학이 책 속의 질서정연한 글자들과는 달리 그 자체로 충분히 혼란스러운 학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과학책들이 알려준 ‘세계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감각은 지금까지도 나의 중심에 있다. 내가 세계 전체를 알게 될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 일부에는 접근할 수 있다는 그런 감각이.
지난 10년간 한국의 과학책 분야는 새로운 국내 저자들의 등장과 꾸준한 번역서 출간에 힘입어 크게 성장했다. 과학을 교양이자 문화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중에서 주목하고 싶은 흐름 중 하나는 최근 여성과 과학을 함께 다루는 책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아토믹 걸스〉와 〈사라진 여성 과학자들〉처럼 과학 역사에서 잊힌 여성들을 조망하는 책들이 활발하게 출간된다. 널리 읽힌 〈랩 걸〉뿐 아니라 〈은여우 길들이기〉나 〈꽃은 알고 있다〉와 같이 여성 과학자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며 마치 나도 연구 현장에 있는 기분을 느낀다.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식물산책〉 역시 식물학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될 만큼 좋았다.
과학책의 한 주축이 과학자들이 직접 쓴 책이라면, 다른 주축은 저널리스트들이 하나의 주제를 정해 취재와 조사를 거쳐 쓰는 책들인데, 사실 나는 이런 계열의 책을 무척 좋아한다. 군(軍) 과학자들의 연구를 살피는 메리 로치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인간의 오감과 초감각을 인지과학적으로 다룬 카라 플라토니의 〈감각의 미래〉, 인류세에 관한 서늘하면서도 낙관적인 전망을 펼친 다이앤 애커먼의 〈휴먼 에이지〉를 정말 즐겁게 읽었다. 이 책들은 주로 저널리스트 출신의 과학 저술가들이 집필한 책으로, 비과학자 저자들이 과학 현장으로 직접 가서 연구자들을 취재하기 때문에 저자들이 가진 독특한 필체에 냉철하고 가감 없는 연구 현장 묘사가 더해지는 매력이 있다. 독자들에게도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것은 덤이다.
과학책이 진짜 과학을 반영하느냐고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고전은 너무 오래돼 현대의 과학 지식을 따라잡지 못하고, 또 어떤 책은 흥미로운 서술에만 집중하다 오류를 잔뜩 담은 채로 출간된다. 과학자들은 이따금 대중 과학서에 불만을 토로한다. 실제의 연구 과정을 담아내지 못한다든가, 과학을 왜곡한다든가. 물론 모두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나는 그래도 많은 사람이 과학책의 매력을 발견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들이 독자들에게 주는 인식과 세계의 확장은 다소 불완전한 형태라 해도 과학책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종류의 것이니까. 어느 때보다 좁은 공간에서 제한된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지금, 과학책을 통해 일상의 경험을 넘어서는 시공간을 탐험해 보기를 제안하고 싶다. 이 시기를 견딜 작은 힘이 뜻밖의 새로운 경험이 돼줄지도 모른다.
 
김초엽93년생 소설가. 포항공과대학교 생화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면〉을 펴냈다. 따뜻하고 보편적인 서사의 SF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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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이마루
  • 디자인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