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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행과 청약통장 사이 #에디터's_집썰

나는 무주택 세대원이다.

BYELLE2020.10.09

소확행과 청약통장 사이

나는 무주택 세대원이다. 주택청약종합저축통장을 만들면서 알게 됐다. 막연히 독립을 꿈꾸긴 하지만 늘 생각뿐. 부모님 품 안에서 저축의 필요성조차 잘 실감하지 못하던 나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 속 청춘들과 다름없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 ‘도달된 상태만을 꿈꾸는’ 사회초년생. 그러던 내가 어쩌다 갑자기 청약통장을 만들게 됐을까? 20대 중반을 기점으로 친구들과 만나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돈을 모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흘러 들어갔다(자산관리나 재테크는 그보다 먼 미래의 이야기라 믿었으므로). 이제 막 디자이너로, 은행원으로, 변호사로 커리어를 시작한 친구들은 각자 회사 동료로부터 조금씩 주워 담기 시작한 경제 지식을 늘어놓았고,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린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를 빙빙 맴돌았다. 신용등급을 잘 받기 위해서는 신용카드를 매달 적어도 이 정도는 써야 한다느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하루빨리 독립해 세대주가 되어야 한다느니…. 청약은 그중에서도 가장 만만한 주제였다. 매달 2만 원을 넣어야 할지, 10만 원을 넣어야 할지, 납입 횟수와 납입 금액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는 만날 때마다 새로웠다. 거기에 대학교 신입생 때부터 이어져온 부모님의 신신당부까지 더해져 지난해 말, 취업에 성공하자마자 어영부영 청약통장부터 개설하게 된 것이다. 입사 동기 중엔 이미 만기 청약통장을 갖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인터넷에서 보니 청약 가입이 가능한 만 17세가 되자마자 자식 명의의 청약통장을 만들어둔 발 빠른 엄마도 많았다. 그러면서 문득 든 생각. ‘난 이미 글러먹은 걸까?’ ‘차라리 이 돈을 다른 곳에 써야 할까?’
 
베일에 싸인 미래의 집을 위해 가성비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포기하긴 싫지만, 당장의 행복만을 좇으며 살다가 평생 원룸에 갇혀 사는 것도 싫다.
 
노을을 감상하며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작은 테라스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서재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하노키 욕조…. 불과 몇 년 전, 미래의 집을 상상할 때 떠오르던 많은 것이 빠르게 현실의 언어로 이관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나는 공공분양과 민영분양, 전용면적 40㎡ 이상 혹은 이하, 수도권과 비수도권, 가족 구성원 수 등을 기준으로 집에 대한 욕망을 정리해야 하는 나이가 됐다. 이미 가진 자들이 더 많은 집을 가지려 하고, ‘조금 양보해서 이 정도면 오케이’라고 생각했던 경기권 아파트조차 천정부지로 가격이 뛰는 것을 보며 드림 하우스에 대한 꿈은 점점 더 요원해짐을 느낀다. 물론 당장이라도 혼자 살 공간을 마련할 순 있다. 필요한 돈은 보증금 2000만 원에 월 60만 원 정도(금융 앱으로 확인한 바로는 금리 2.9%로 주거래 은행에서 약 4000만 원을 대출받을 수 있다). 실제로 친구 중엔 경제적 독립과 동시에 자취를 시작한 케이스도 많았다. 그들은 매번 이렇게 강조했다. 조상까지 나서서 도와야 가능하다는 아파트 분양 당첨에 목을 메느니 차라리 하루빨리 혼자만의 세상을 꾸리고 그 안에서 ‘소확행’을 만끽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물론 정답은 없다. 현실을 만끽하는 것과 미래를 위한 준비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는 여전히 방황 중이다. 베일에 싸인 미래의 집을 위해 가성비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포기하긴 싫지만, 당장의 행복만을 좇으며 살다가 평생 원룸에 갇혀 사는 것도 싫다. 때로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기도 하니까. 어쨌든 다가오는 25일엔 어김없이 청약 12회 차 분이 출금될 것이다. 매달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5만 원에는 이런 복잡한 심경이 얽혀 있다. 
 
직장생활 2년 차. 갈팡질팡하는 20대 후반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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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편집부
  • 디자인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