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의 서울 유랑기 #에디터's_집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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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의 서울 유랑기 #에디터's_집썰

8번의 이사 끝에 배운 것은 이 도시에서 변하지 않는 동네는 없다는 것이다

ELLE BY ELLE 2020.10.05

1인 가구의 서울 유랑기

얼마 전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할 일이 있었다. 과거의 주소 변동 사항을 출력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길래 호기심에 눌렀더니, ‘드르륵’ 출력되는 페이지 수에 내가 놀라고 말았다. 주소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은 서울살이를 시작한 스무 살 이후의 거처들이었다. 말 그대로 학교 앞 원룸이었던 첫 번째 집,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상경하면서 함께 살게 된 오피스텔을 거쳐 투 룸을 전전하는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5년 동안 여덟 곳에서 살다 보니 회기동, 연희동, 망원동, 등촌동, 만리동 그리고 지금 거주하는 답십리동 외에도 돌아다녀본 동네의 골목 수는 훨씬 더 많다. 연남동, 세검정, 홍제동, 해방촌, 신림동, 흑석동…. 고양이와 함께 사는 맥시멀리스트가 예산 안에서 고를 수 있는 집은 이렇게 오래된 주거 밀집 지역뿐이기 때문이다.
서울을 총총 쏘다니며 배운 게 있다면 이 도시에서 변하지 않는 동네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토록 사람도, 건물도 많은데 계속 뭔가가 새로 생겨난다는 게 경이로울 지경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모든 철거나 재개발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도 배웠다. 동생과 함께 산 마지막 집이 망원동이 된 이유는 자꾸만 ‘핫’해지는 망원동을 비슷한 비용에 계속 살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후 살게 된 만리동 근방 효창공원앞역에 경의중앙선이 개통하고, 중림동 ‘중리단길’ 기사가 날 때도 반갑기보다 조마조마했다. 비록 만리동 집을 떠나야 했던 결정적 이유는 집주인의 아들 가족이 살던 아현동이 재개발되며 내가 살던 집이 그들의 임시 거처가 돼야 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1년 뒤에 가보니 동네의 한 구역이 그야말로 깨끗이 ‘밀렸고’, 또 1년 뒤에는 그 자리에 들어설 아파트 분양 광고가 붙어 있었다. 256:1의 경쟁률로 나는 청약에 떨어졌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1983년에 지어진 곳으로 집주인은 재개발을 향한 기대에 부풀어 있다. “내가 전세금은 안 올릴게요. 재개발이 또 10년씩 걸리기도 하니까 불안해하지 마세요.” 노후한 복도식 아파트 계단에 포기한 듯 쌓인 짐들을 보면, 내가 지금 동네에 품고 있는 애정과 별개로 건물이 통째로 모든 게 사라질 언젠가의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최선의 선택과 판단을 내려 혼자 내 삶의 주거를 책임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유랑하는 삶이 그저 서럽고 지겹게 느껴지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발품을 팔아 집을 찾고, 전입신고를 하고, 각각의 집에서 보낸 나날. 때로는 내용증명을 보내며 임대인과 싸워보기도 하고, 사는 동안 잘 살고 싶어 타일과 페인트를 고르던 시간들.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과 판단을 내려 성인으로서 혼자 완전하게 내 삶의 주거를 책임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주거 문제’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은 이후에는 거처를 마련하는 게 내 독립된 정체성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2층도 아닌 5층이나 6층의 높은 건물에 층층이 사람이 산다는 것이었다.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그러면서 자식을 키우고 또 자식을 낳고 사람이 사람 위에 포개지고 그 위에 또 얹혀서 살림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조정래의 1973년 작 〈비탈진 음지〉의 이 인용문을 발굴한 것은 대학시절에 쓴 리포트였다. “결국 난 이 도시의 아파트 비슷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풍경은 아파트뿐이므로”라고 리포트를 끝맺었던 22세의 ‘나’는 서울에서 아파트를 마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성취인지는 몰랐으리라. 그러나 부동산의 격변을 지켜본 지난 5~6년간 ‘아파트’를 향한 내 마음은 한층 공고해졌다. 나와 헤어진 이후 역시나 빌라를 전전하며 주변 공사 소음에 지쳐버린 동생이 얼마 전 서울 외곽의 다세대주택 한 칸을 매입하겠다고 했을 때 “아파트 아니면 집 사지 마”라고 말렸던 나는 미련하고 무모한 꿈에 매달려 있을 뿐인 걸까?  
 
상경 15년 차.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사는 30대 중반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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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엘르피처팀
    디자인 김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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