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젊은 정치인이 필요하다

'관례'의 기준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BYELLE2020.09.27
적폐 청산 수사·재판을 취재할 당시, 피의자·피고인이 가장 많이 폈던 반론은 ‘관례대로 했을 뿐’이라는 거였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있지만 불법일 거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했다”고들 했다. 그래서 때로 자문해 봤다. 당시 업무 담당자 선에서는 나름의 필요와 당위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현실을 잘 모른 채 지나치게 엄격한, 이상적 잣대를 내가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답은 알 수 없고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최소한 이 경험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진보하기를 기대했다. 앞으로는 일상에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수많은 관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그때그때 토론하고 논의하면서 합의하고 고쳐나가는 문화가 생기게 될 거라고 말이다.
 
아쉽게도 다양하고 미세한 그 놈의 ‘관례’는 여전히 많은 분야에 남아 있다. 굳이 비서실 여성 직원에게 샤워장으로 속옷을 배달시키고, 퇴근 후에 사적인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는 게 고 박원순 서울 시장에게는 업무 ‘관례’였던 걸까. 피해자 측 기자회견에 따르면 피해자는 2016년부터 여러 차례 주위에 이런 고충을 호소하며 인사이동을 희망했지만, ‘예뻐서 그랬겠지’ ‘시장에게 직접 인사 허락을 받아라’ 등의 답을 들었을 뿐 적극적인 조치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입장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피고소인인 박 시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방어권을 완벽히 포기했다. 동시에 피해자는 심판과 사과 받을 권리를 영원히 빼앗겼다.
 
어렵게 용기를 낸 피해자에게 쏟아진 건 범여권의 비난이었다. 여당 대표는 관련 질문을 한 기자에게 욕설을 했고, 현직 여당 의원들은 ‘사자 명예훼손’을 들먹였다. “4년 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 그러느냐”는 비아냥도 공공연히 방송됐다. 이런 현상을 보고 있노라니 성추행 고소 보도를 접한 직후보다 더 큰 실망과 분노가 치밀었다. 권력자가 힘을 남용하는 일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의혹이 제기됐을 때 정확하게 사실 여부를 가려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만든 게 국회이며 정당이고 언론과 시민단체다. 오히려 본연의 역할에 역행하는 행태들이었다. 게다가 피해자는 서울시 차원의 조직적 은폐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이 죽었다고 이 의혹도 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벌써 세 번째 여당 소속 지자체장의 성범죄 논란이다. 2년 전 안희정 사건 직후 민주당은 ‘젠더폭력근절대책TF’를 만들었다. 여성가족부도 ‘직장 내’ ‘공공기관의 장 등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을 만들어 발표했다. 이 모든 게 간판만 내걸었을 뿐이었다는 것은,  이후의 사건들이 증명한다.
 
뒤늦게 여론이 악화되자 떠밀리듯 태세를 바꾸고 사과하는 여당의 모습은 타이밍도 문제지만 진정성도 떨어졌다. 이런 잘못된 사태 판단에는 여성단체 출신 현직 여성 의원들의 목소리도 한몫했다고 한다. 한때 열렬히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던 이들이 왜 저러는 걸까, 실망스럽게 바라보며 내린 결론은 하나다. 이건 젠더와 정치 성향을 떠나 ‘세대의 문제’구나. 피해자 측이 고소장과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성적 접촉을 요구하고 속옷 사진을 보낸 정도’는 성범죄로 보기 어렵다는 인식, ‘별것도 아닌 걸 문제 삼는 이유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윗세대에게는 여전히 관례처럼 공유되는 것 아닐까.
 
2002년생이 선거권을 가진 18세 성인이 되어 자라도록 국회와 정부, 청와대 구성원들의 얼굴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2000년대에 정치를 했던 이들은 2020년에도 정치권 주류로 활약 중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대의 의견을 존중이라도 해야 할 텐데 피해자에게 연대와 지지의 뜻을 표한 류호정(29세)·장혜영(34세) 정의당 의원을 비난하기 바쁜 정치권의 모습에서 그런 의지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여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30대, 특히 2040 여성들의 지지율이 급락했다는 사실이 과연 부동산 정책 때문만일까? 대통령 공약 중에는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18세로 낮추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10대 의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20~30대 선출직과 공직자를 중용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이상하고 당연한 것, ‘관례’의 기준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니까.
 
writer_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 제14회 올해의 여기자상을 받은, 언론의 최전방에 서 있는 JTBC 기자. 30여년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 했다. 더 많은 여성 동료가 함께 일하며 버텨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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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이마루
  • 디자인 이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