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 온 더 누들로드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넘나들며 인류의 국수 문화를 조명한 <누들 로드>. 3000년의 국수 문명사를 좇아 2년 동안 타향살이를 자처한 끝에 <누들 로드>를 완성한 ‘시간 여행자’는 이욱정PD다. 전 세계에 흩어진 국수 역사의 파편을 재료 삼아 맛깔나게 구성하고 편집한 그는 방송국에서 야식을 시킬 때도 허투루 챙겨 먹는 법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미식가다. <누들 로드>의 엄청난 성공과 영광을 뒤로한 채 이제 그는 런던으로 요리 유학을 떠난다. 요리하는 남자로서의 삶 또한 무척 흥미진진할 것이다. 그의 국수 여정이 그러했듯이. :: 깔끔한,따뜻한, dimgray, palegoldenrod,일상,엘르,엘라서울,엣진,elle.co.kr :: | :: 깔끔한,따뜻한,dimgray,palegoldenrod,일상

제1편 On Air“어릴 적 부엌에 가면 일본어로 된 요리책들이 제 키만큼 쌓여 있었어요. 일본에서 자란 어머니께서 당신이 가지고 계셨던 요리책들로 저에게 요리를 해주시는 걸 무척 좋아하셨죠.” 성공한 요리사에게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물을 때, 대개 열에 아홉은 이렇게 답한다. 자식 사랑을 요리로 표현하는 전형 적인 어머니와 그 밑에서 자란 아들의 이야기. 이 흔한 스토리를 방송국 PD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것이 낯설다면 낯설까. 이욱정이 문화인류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평소 작은 캠코더 를 들고 다니며 주변 사람들과 사물을 뷰파인더로 관찰하는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역시 방송국 PD가 아닌 요리사 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리와 먹을거리에 ‘유별난’ 가정에서 자란 탓에 그는 방송국 안에서도 알아주는 ‘식신’으로 통한다.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 입에서 곡소리가 날 정도로 깐깐하다고 소문났지만, ‘그래도 이욱정 PD랑 일하면 먹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제대로다’란 말까지 들을 정도니까.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의 허기’에 시달려도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 그것은 대충 끼니 때우기도 급급한 해외 출장 중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뿐이랴. 야외 촬영을 나가거나 MT를 갈 때면 이욱정은 현장에서 출장 요리사 역할도 자처한다. 돼지고기를 된장에 재워 바비큐로 구워주거나 동치미 국물 얼려 가서 즉석에서 국수를 삶아 말아준다. 이런 남자, 서울 시내에서도 흔치 않지만 ‘마초’ 냄새 물씬한 방송국 안에서는 더더욱 흔치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방송국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그에게 ‘컨펌’을 받는 막내 스태프가 있는가 하면, 족발과 보쌈 등의 야식을 먹을 때도 ‘핫한’ 곳 좀 알려달라고 전화하는 동료도 있다. 이런 전적에서 짐작되다시피 그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쭉, 요리를 주제로 삶을 조금씩, 다양하게 바꾸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음식 문화사’와 ‘쿠킹’에 대한 전문 다큐 멘터리언으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누들’이었을까? “아버지가 평안도 출신이에요. 어릴 적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곧잘 평안도 냉면을 만들어 먹곤 했죠. 어머니는 일본에서 당신이 먹고 자란 우동과 소바를 해주셨죠. 집에서 아시아의 면 요리를 골고루 먹고 자란 탓에 커서도 면 요리를 즐겨 먹었어요. 가족끼리 식탁에 앉아 국수 잘 뽑는 방법에 대해 대화가 아닌 ‘토론’ 수준으로 얘기하는 집은 흔치 않잖아요?” 그는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때도 음식 문화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석사 논문 주제로 ‘이슬람의 음식 금기 문화’에 대해 쓸 만큼 말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다. 유럽으로 출장을 갔을 때 어느 ‘누들 바’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새삼 국수의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이 서툰 솜씨로 젓가락질을 해 가며 아시아의 국수를 맛있게 먹는 모습이 신기했다. 더구나 프라이빗한 공간을 선호하는 서양인들이 마치 우리나라의 대학 구내 식당처럼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수를 먹는 풍경이라니. ‘아시아의 저렴한 국수 요리가 깐깐한 서양인들에게 어떻게 트렌디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지?’ 는 그의 이런 단순한 호기심 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는 다큐멘터리 라기보다는 한 편의 로드 무비와 같았다. 독특한 스토리텔링과 화려한 영상, 속도감 있는 편집, 화면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일렉트로닉 사운드…. 이 낯선 다큐멘터리는 한마디로 경쾌하고 흥미진진했다. 마치 을 한 편의 뮤직 비디오 처럼 만든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처럼. 제2편 Beyond the Scene이욱정은 얼마 전, 다큐멘터리에 이어 를 책으로도 냈다. 다큐멘터리를 재탕한 그저 그런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400쪽 분량의 책에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가 직접 찍은 사진, 다사다난했던 촬영 일지와 다큐 멘터리에서 얘기하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다. 다큐멘터리가 뛰어난 영상과 빠른 편집, 화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사운드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강조했다면, 책은 국수의 문명사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취재한 지적인 관찰이 돋보인다. 이욱정의 음식에 대한 열정과 의욕,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력 등 다큐멘터리언으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이 기록되어 있다고 할까? 중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할아버지가 내준 ‘썩은 동아줄’ 같은 밧줄 하나에 의지해서 100년도 넘었다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고, 송전탑 바로 직전까지 헬기를 붙여 공중을 촬영한 다이내믹한 에피소드 등을 담고 있어 마치 DVD 영화의 ‘코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또 하나. 사진을 통해 취재 중 만난 사람과 풍경을 포착한 것이 거의 작품 수준이다. 이것은 빠르게 전개되는 다큐멘터리 영상 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전문 사진가가 찍은 것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수준의 사진은 늘 카메라를 끼고 사는 PD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 까지나 기술적인 부분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의 사진 에는 관찰에서 비롯된 성실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유난히 클로즈업 컷이 많은 이유 역시 그만큼 그가 디테일에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평소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아내와 함께 그가 서울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인 삼청동과 가회동, 평창동, 홍대 앞을 걸어 다니면서 일상을 스케치하고 서울이라는 도시를 기록한다. 어디서나 쉽고 빠르게 익혀서 먹을 수 있다는 것, 수 많은 식재료와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는 점, 트렌디하다는 점 등에서 국수를 도시 문화의 산물이라고 정의한 ‘서울리안’인 그가 서울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면 어떤 영상과 음악을 담아낼까? “한강을 찍어야 되겠죠. 그 위의 고가도로를 담아낼 거예요. 가장 서울다운 곳, 가장 도시적인 풍경부터 찾겠죠. 그리고 음악은… 음, 음악은 우리가 도시 속에서 바쁘게 살면서 놓치고 사는 소리들을 담을 거예요. 이를테면 빌딩과 빌딩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 소리, 출근할 때 바쁘게 걷는 사람들의 걸음 소리,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 여고생의 웃음 소리, 낙엽이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 막걸리를 잔에 따를 때 나는 소리 등등.” 제3편 Cook the London이욱정은 늘 행복과 즐거움에 승부수를 던지는 남자다. 그는 이제 런던으로 요리 유학을 떠난다. 30여 개국의 나라에 수출 되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한국방송대상과 아시아 태평양 방송연맹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도 인정받은 의 영광을 좀 더 누릴 법도 한데 서둘러 떠나게 되었다. 하던 일만 ‘접고’ 떠나는 게 아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노영희가 운영하는 쿠킹 스튜디오 ‘푸디(foodie)’에서 요리를 배우고, 숨겨진 맛집과 술집을 찾아가서 지인들과 음식에 대해 밤늦게까지 수다 떠는 서울에서의 소소한 낙도 잠시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요리 유학을 간다면서 왜 하필 ‘피시 앤 칩스’의 나라, 영국이란 말인가? ‘런던 르 코르동 블루에서 요리 유학 하기로 했다’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그를 쳐다본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가장 척박한 땅에서 가장 우수한 와인이 탄생한다고. 영국, 특히 런던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요리가 가장 뒤늦게 발달한 나라예요. 척박하기 때문에 요리에 관해 가장 절실하고 성실한 태도를 가졌죠. 일본과 비슷해요. 전 세계 에서 온갖 훌륭한 식재료들이 모이고, 전 세계 스타 셰프들의 레스토랑이 거의 다 들어와 있는 곳이 런던이에요.” 런던을 택한 이유는 또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를 만든 BBC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리와 다큐멘터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포부가 실린 유학인 셈이다. “사실 요리하는 것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우선 재료가 신선해야 해요. 또 각 재료를 잘 조합하고 버무릴 줄 알아야 하고요. 그러려면 신선한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중요하고, 수준 높은 테크닉도 필요 하지요.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멋지고 감각적인 비주얼 로 완성도를 높일 줄도 알아야 하고요.”그는 분명 다음 프로젝트의 상당 부분에 런던에서 보고 느낀 바를 충실하게 담아낼 것이다. “생선을 잡고 요리하는 인류의 문명사를 조명하고 싶어요. 여기에 바다 오염과 같은 환경 파괴 까지 진지하게 얘기하려고 해요. 또 세계적인 요리사들의 인간 적인 면모를 관찰하고 그들의 요리 철학을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기도 해요.” 이런 그에게 런던 요리 유학은 시의 적절한 선택일지 모른다. 그는 런던에서 세계적인 스타 셰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할 것이고, 옥스퍼드 도서관과 대영 박물관을 오가며 그곳에 보관 된 인류학적 자료들을 포식할 것이다. 또 유럽 곳곳에 존재하는 푸드 로드를 걷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니 그가 어찌 서둘러 배낭을 꾸리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나.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몫이라고. *자세한내용은 엘라서울 12월 본지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