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칼로리 패션이 선사하는 화려한 만찬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식물성 바이러스 주의보. 초식남 애기가 아니다. 탐욕적인 본능에만 충실했던 패션 또한 칼로리 소모에 도전하고 있다. 해독제는 다름 아닌 패션 '자신'이다. 식물성 패션이 선사하는 화려한 만찬에 대하여. |

1 이브 생 로랑 코트실크 새틴 소재의 자세 낮추기. 자동차 업계에서 유래한 고온 몰딩 기법이 재활용 무드가 물씬 풍기는 금욕적 이브닝 코트를 탄생시켰다. 최고급 식재료가 실험정신이 넘치는 스타 셰프를 만나 감칠맛 나는 요리로 변화한 셈. 실크 새틴의 희생이 눈물나게 안타깝다면 당신은 머슴입맛이 분명하다.2 발렉스트라 레더 백음과 양의 조합이 완벽하고, 미니멀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보양식 삼계탕. 간결한 라인과 견고함을 겸비한 발렉스트라의 크림 컬러 백과 닮은 꼴이다. 가죽 소재가 갖는 불온한 콜레스테롤을 말끔히 정화하는 건 맨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레서피 덕분.3 리바이스 레이스 다이아몬드 컬렉션일상의 독소를 빼내는 데 데님만한 아이템은 없다. 그렇다면 수공예 ‘느낌’의 레이스와 크로셰 디테일에 스와로브스키 다이아몬드로 장점을 찍은 리바이스의 데님은? 최근 인도에서 출시한 식물성 ‘초코파이’쯤으로 해두자. ‘진짜’ 오가닉 입문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워밍업의 시간을 허락해줄 것이다.4 펜디 퍼 코트‘무대포 정신’에서 2% 물러난 이성적 모피. 18캐럿의 고운 백금가루가 진공 상태의 모피 털이 한 올 한 올 열릴 때 영구적인 상태로 표면에 전사하는 나노 테크놀로지다. 호사스럽지만 무모하지 않다는 점에서 ‘플란차 그릴’과 이란 요리와 뜻을 같이 하는데 오묘한 과학의 비밀이 숨겨진 ‘플란차’라는 철판은 각 재료에 육즙을 섞이지 않게 지방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한다. 담백한 고기 맛과 남미 향신료가 곁들여진 이 요리의 영리함을 닮은 펜디의 기술 혁신 코트는 EQ가 높은 동물인자들에게 권장하고픈 아이템.5 고야드 백고야드의 백은 이율배반적이다. 캔버스 천에 아라비아 고무로 채색한 후 특수 염료로 하나 하나 고유의 모티프를 찍어 만드는 장인 정신이 있는가 하면, 정복자의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는 동물적 본능의 서비스 또한 제공한다. 마블링이 풍성한 최상급 쇠갈비살을 화로가 아닌 로젠탈의 수제 그릇에 몇 점 담아 먹는 기분.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동요 ‘옹달샘’에 등장하는 토끼만큼 최근 트렌드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멸종됐던 식물성 바이러스가 창궐하기라도 한 것인지. 여기저기서 초식남들의 고해성사가 줄울 잇는다. 그렇다면 남성호르몬의 멸종을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바라볼 것인가. 종족 번식이라는 인류의 고귀한 과업만 제외한다면 남성들은 이제야 자기애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간 성별은 차치하고 동물성이라는 본능은 상당 부분 왜곡돼왔다. 무모하게 전쟁터로 뛰어드는 일이 자아를 획득하는 일인 양 길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육식형 인간은 남을 위한 자신에 더 충실했다. 불특정 다수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에 기대 소모적인 삶을 살아왔다. 껍데기에 불과한 동물적 삶은 앞만 보며 달리기를 재촉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실점이 그들의 목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소실점은 언제나 소실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 권하는 시대’는 그 소실점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부푼 꿈을 꾸게 한다. 결국 판타지를 위한 소비를 거듭하다 진공 상태를 체험하고 만다. 초식형 인간의 등장은 이런 포화 상태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을 터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노골적인 결과에 열광하는 대신 과정을 즐긴다. 초식형 인간이 무심한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져왔다면 그것 역시 난센스다. 모든 에너지가 내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이 족속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주 세심한 것에서부터 찾아낸다. 식물적 에너지는 동물적 에너지보다 훨씬 더 끈끈하며 밀도도 높다. 전방위적으로 흩어져버리는 동물적 에너지는 축적될 틈이 없다. 한 번의 사냥으로 한 번의 끼니를 때우는 동물의 세계는 굶주림에서 비롯된다. ‘0’과 ‘100’이라는 완전한 수치만 있을 뿐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식물형 인간의 다채로움이란 ‘0’과 ‘100’ 사이에 존재한다. 이들에겐 ‘무엇’보다 ‘어떻게’라는 물음이 더 중요하다. 식물형 인간들의 무심함이란 ‘무엇’에만 해당된다. ‘어떻게’라는 명제에 한해서는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 토끼’는 분명 그 물의 ‘어떻게’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식물형 인간은 토끼의 우유부단함이 아닌 무한한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이다.취향. 동물형 인간이나 식물형 인간에게도 분명 호불호는 존재한다. 호불호의 가치를 어느 곳에 두느냐 하는 차이뿐이다. 취향이나 기호를 이야기할 때 음식만큼 빠질 수 없는 패션 또한 이 논쟁에서 예외일 수 없다. 지금껏 패션은 찰나적 욕구에만 충실한 동물성으로 분류돼왔다. 에덴 동산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뛰놀던 아담과 이브를 제외하고라면. 인간의 속성이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무얼 먹고사는지보다 무얼 입고 사는지를 통해 상대 지위를 간파하는 것도 시공간을 초월한 습성이다. 남들과 섞여 지내는 공간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많은 ‘눈길질’을 당한다. 남의 이목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패션은 인간의 동물적 요소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럼에도 요즘 패션계에 흐르는 기류는 뭔가 미심쩍다.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감춰 온 문익점 선생의 정신은 아니더라도 ‘패션 빅팀’이라 불리던 피해의식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노후한 패션 하우스를 재건하며 패션계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 후반. 우리는 패션에 희생된 수많은 이들을 목격해왔다. 하이 패션 브랜드들의 로고 플레이에 벌겋게 눈이 충혈된 채로 백화점을 전전하거나, 그 포획물을 몸에 전시한 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 자신의 물아일체 현상을 경험하거나. 패션을 만드는 사람과, 패션을 입는 사람 모두 같은 취지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물론, 패션이 선사하는 달콤한 중독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이 동물적 방식으로 소비되든, 식물적 방식으로 소비되든 그 원형이 갖는 속물 근성의 혐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패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대두되는 식물성 운동이 쉽게 폄하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변방에서 일어날 법한 현상이 주류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발적이다. 패션의 동물지수를 낮추려는 디톡스 현상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10여 년 전만 해도 보조가방 혹은 실내화주머니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던 코튼 소재 가방만 해도 그렇다. 콧대 높고 우아하기 그지 없는 명품 가방의 자리를 꿰찬 아무개 씨의 활약은 최근의 트렌드 중 가장 칼로리가 낮은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의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휴대전화의 기름기를 빼려는 건지 고무 소재의 검소한 손목시계를 차는 일 또한 식물성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퍽퍽한 닭가슴 살처럼 ‘청렴 담백’해지고 있는 이들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이 21세기 트렌드로 부활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패션동물주의자와 식물주의자의 역전 현상. 저항군으로 자리매김하던 꼼 데 가르송이나 앤 드뮐미스터, 마르탱 마르지엘라 등이 소비의 첨병에 서 있는 패션 피플들의 입에서 빈번하게 오르내린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옷을 해체하며, 심지어 나긋나긋하지도 않다. 엄격한 식물주의자들의 입맛에나 맞을 극단적 마이너 성향이 어떤 부작용도 없이 무대 위를 활보하고 있다. 물론 이 가운데서 식물성의 본질이 왜곡되기도 한다. 동물성 분자가 식물성 분자를 삼켜 버리는 건 그리 힘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얼마 전 거리 리어카에서 철자 하나의 오류도 없이 ‘ANN DEMEULEMEESTER’라 또박또박 적힌 비닐 백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정신과 물질의 합일을 중요시하는 극성 식물주의자들은 껍질만 남은 브랜드를 버리고 빈티지나 소규모 개인 디자이너에게 열광하곤 한다. 진보적 성향의 식물주의자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동물성 인자들을 희화화하기에 이른다(천으로 직접 만든 샤넬 로고를 흰 티셔츠에 붙이는 일, 실제로 10꼬르소 꼬모에서는 빛바랜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 10g도 되지 않을 듯한 모터 백이 판매되고 있다). 식물 분자들의 특징은 유연하다는 것이다. 질긴 고기만으로 연명해온 이들은 패션을 무기 이상의 그 무엇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 소모가 결국 식물주의자들의 패션론을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창조가 아닌 재해석의 시점에 이른 패션계의 주기와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하다. 패션식물주의자들은 아둔한 척 현명하다. 어떤 아이템을 소비하는 데 들인 과정에 따라붙는 플러스 알파의 영역이 본질인 아이템까지도 넘나든다. 최근 붐을 일으키고 있는 멀티숍만 봐도 그 흐름이 명확하게 읽혀진다. 청담동 일대에 으리으리하게 위용을 드러냈던 1세대 멀티숍은 본질에만 충실했다. 사냥감을 찾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결과만 있는 곳이다. 패션동물주의자들은 그 간명함을 패션, 즉 쇼핑의 미덕으로 여겨왔다. 동물성을 버리지 않은 채 식물성의 고명만 예쁘게 올려놓은 멀티숍들이 2세대였다면, 3세대의 멀티숍엔 식물성 원액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들은 숍이라는 명칭 대신 ‘공간’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도 있다. 음악과 그림, 사진, 인테리어, 그리고 향기까지. 패션의 태생적 고칼로리를 죽이는 데 공감각적 요소들을 활용한다. 멀티숍 ‘프로젝트 민트’를 운영하고 있는 최미선 사장은 말한다. “옷보다 옷을 입은 나 자신인 거죠. 그래서 패션 아닌 라이프스타일인 거고요. 그러다 보니 요즘 말하는 식물성이 된 건데. 오가닉, 친환경, 웰빙 패션을 환경론과 결부하는 건 약간의 과장이고.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해 결국 내 몸에 좋고 편한 패션, 즉 착한 패션을 만들게 된 거에요. 예를 들면 옷을 바잉할 때 지금 당장 보아서 좋은 옷이 아닌 세탁한 후 소재의 느낌 등을 중요시하는 것이 그래요. 또 한 가지를 더한다면 스토리를 만드는 거죠. 패션이 주는 동물적 성향을 희석시키는 데 설득력을 주는 일이거든요. 코튼이나 리넨처럼 몸에 편안한 소재의 옷들과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재활용한 인테리어, 오가닉 재료로 만든 홈메이드 버거 등을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어쩌면 이같은 패션의 식물성 현상은 패션인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허구일 수 있다. 아직도 패션은 수많은 동물적 이론에 의해 소비되고 있으며 디자이너 로베르토 카발리는 식물성으로 분류되는 ‘less is more’는 스트리트 브랜드를 위한 것이라며 동물적이고 노골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패션에 대한 옹호론을 펼친다. 패션의 궁극은 실제 아름다움에 있다. 아름다움을 빼고라면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 패션이다. 많은 이들이 이 아름다움을 소비한다. 동물성과 식물성이라는 이분법은 시대 흐름을 해석하는 편의 중 하나다. 단지 우리는 식물성 패션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것뿐이다. 무기가 아닌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덕으로서의 패션 말이다.*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0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