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삶을 살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스웨덴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수잔’이면서 ‘기란’인 여자의 이야기, 1967년 시작돼 ‘오늘’도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수잔,조주희,시크한,단아한,매력적인,스페셜 장소, 레스토랑, 카페, 무대,기념일,데이트, 생일, 스페셜 데이,제넥스,스웨덴,패션계,입양아,스톡홀름,편지,엘르,엣진,elle.co.kr:: | ::수잔,조주희,시크한,단아한,매력적인

60년대 빈티지 원피스를 입은 수잔. 그녀는 집 거실에서 를 향해 카메라 앞에 앉았다.Dear 한국2010년 8월, 인천공항. 오늘은 유난히 덥고 습하다. 열두 시간 비행에 블랙 레깅스와 베이지 색 H&M 레이스 톱은 좀 구겨졌다. 하지만 단단히 묶은 머리, 길고 검고 숱 많은 내 머리는 끄떡없었다. 짐을 찾아 나오는데 뭔가 쿰쿰하고 따뜻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 덩달아 덥혀지는 심장. 나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집을 나선 지 꼬박 하루 만이다. 나는 43년째 스웨덴에 살고 있다. 지금 사는 집은 1910년경에 지어진 유서 깊은 아파트.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 매일 한 폭의 그림이 새로 그려지는 것처럼 아름답다. 캐주얼한 차림의 여행객들과 말끔히 갖춰 입은 직장인들이 어우러져 거리는 더 생기를 띤다. 특히 ‘해변길(Strandvagen)’이라고 불리는 바다 옆 산책로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럭셔리한 보트들과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변 지역을 ‘외스테르말름(Ostermalm)’이라 부른다. 값비싼 디자이너 부티크들과 호텔, 뮤지엄이 몰려 있다. 나이트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곳들도 마찬가지. 사실 스톡홀름은 서울보다 훨씬 작은 도시다. 인구가 1백만 명도 안 되니까. 그런데 여기 사는 사람들 숫자만큼 많은 사람들이 매년 이곳으로 관광을 온다. 작은 도시면서도 큰 도시 부럽잖은 겉모습을 갖추고 얘깃거리가 흐르는 모습과 스톡홀롬, 내 고향을 나는 사랑한다. My Life Partner 2010년이 한 달 남짓 남은 지금. 내년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느 때보다 특별하다. 결혼 25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2011년 7월 19일은 남편 보(Bo)와 나의 은혼식이다. 우리는 둘 다 개성이 강하다. 그만큼 한 길을 걸어가는 데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남편 노릇, 아내 노릇은 차라리 간단했다. 각자 커리어에 집중하면서 부부로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두 아이를 기르고, 건강도 챙기고 외모도 가꾸고 집안일도 돌보는 일들을 함께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자면,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랑이었다. 서로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했다면 이만큼 멀리 오진 못했을 것같다. 1985년 4월의 어느 날, 우리는 처음 만났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스톡홀름에서 잘나가는 나이트클럽엘 갔다. 그녀는 거의 ‘춤꾼’이어서 (후에 유명한 발레리나가 되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시선을 받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와보니 내 친구는 눈에 띄는 외모의 두 남자와 얘기 중이었다. 넷이서 그날 더블 데이트를 했는데, 내 짝이 된 남자는 키가 껑충하고 은빛이 도는 회색 팬츠와 핑크색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바람둥이일 거라 단정 지었다. 하지만 나와 그 ‘핸섬 가이’와의 데이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 커플은 그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끝이 났다. To be Different 어린 시절 나는 스웨덴의 한 시골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동양계 아이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처음엔 잘 몰랐다. 내게 친구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까지만 해도 나는 나를 스웨덴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스웨덴 사람들과 나의 차이점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옐로 걸(Yellow Girl)로 불릴 때마다 더욱 그랬다. 푸른 눈과 곱슬거리는 금발. 스웨덴 사람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지만, 내겐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동네에서 나는 신기한 존재였다. 사춘기가 됐을 때는 나의 ‘다른 모습’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라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시절 친구 중에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별로 없다. 나 자신에 대해, 내 피부색에 대해 좀 더 편안해진 건 성인이 된 이후다. 사춘기 시절엔 내 문제를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 사는 멀쩡한 사람이 속으로 끙끙댄다는 걸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다. 나는 고민들을 묻어둔 채 책과 음악에서 위안을 찾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문제는 있게 마련이고, 각자 열심히 살면서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생각. 그래서 나도 내 문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지 나는 ‘다르게 보이는’ 사람이고, 그래서 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껏 내 인생에서 후회하는 건 단 한 가지다.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어를 말할 수 있었다면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열심히 노력 중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영어를 잘한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덕분에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을 안내하고 연결하는 열정적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입양인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올해 8월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입양인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한국 입양인 단체 IKAA(International Korean Adoptee Associations 세계한인입양인협회)를 통해서다. 한국인 입양아라는 공통점만으로 전 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마음과 마음이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전 세계 한국인 입양아들이 모여 서로를 알고 힘을 키우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정말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차는 강변을 따라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가고, 나는 눈을 감는다. 12시간 전에 남편과 딸 린다에게 굿바이 키스를 했던 장면을 생각한다. 그들이 지금 내 곁에 없는 것이 갑자기 서글프다. 너무 보고 싶다. Starting a Family우리 가족은 네 명이다. 나와 남편에게는 제니(Jenny), 린다 풀상(Linda Fuglsang)이라는 잘 자란 두 딸이 있으니 얼마나 축복인지. 아이들은 한 살 때부터 학교 들어가기 전인 일곱 살까지 어린이집에 다녔다. 그 기간에 남편 보와 나는 아이들을 등하교시키는 일을 번갈아가며 한다. 만약 시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둘다 풀 타임 직업을 가지면서 두 아이를 키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가신 시아버님, 그리고 정말 대단한 여성인 시어머님은 아이들이 아플 때, 우리가 일에 집중해야 할 때 항상 자리를 지켜 주셨다. 우리에겐 정말 큰 지원군이셨던 셈이다. 나도 아이들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들만큼 좋은 할머니가 돼줄 수 있기 바란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가족이다. 적어도 한국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즘엔 1년에 5주 동안 여름휴가를 가면서 일했다는 게 부끄럽기까지 하다. 임신했을 때는 직장에서 똑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1년을 쉴 수 있었고, 복귀할 때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는 완벽한 서비스를 받았다. 스웨덴에 살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인데, 한국과 비교해보자니 새삼 감사하게 된다. 스웨덴은 복지 문제에 관해 워낙 오래 전부터 앞서가는 나라였으니까. 모든 국민이 6, 7세부터 15, 16세까지 받는 초중등 교육은 전액 무료다. 고등학교 역시 전액 무료인 공립학교 혹은 사립학교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학부모나 학생들은 공립학교를 선택한다. 유료로 운영되는 사립고등학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최근 들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들은 사립학교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서 교육에 투자하는 열정이나 사회적 분위기와는 비할 수 없는 것 같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수잔과 보의 결혼 사진, 스톡홀름 중심가에 있는 수잔의 아파트 거실, 입양 오던 1967년,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해 처음 촬영한 사진, 니트 코트와 한국 고무신을 신은 어린 시절의 수잔, 지난해 남편 보와 두 딸과 함께 서울에서 M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촬영하며 찾은 한국 식당. The Big Change큰 딸 제니는 지금 서울에서 모델 겸 배우 일을 하고 있다. 제니의 용감한 선택 덕에 나는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제대로 얘기를 하자면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네 살 때 나는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양부모 가족과 처음부터 잘 어울리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후로도 영원히. 열여섯, 나는 집을 떠났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보며 뭐라고 했다. “한국 말 못해요.” 어색하게 말하고 영어로 “입양아라서 한국말을 모른다” 했다. 그가 갑자기 영어로 물었다. “매일 울었나요?(Did you cry every night?)” 나는 그가 나에게 미안해하고 내 인생이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이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었다. 입양을 떠나 ‘불쌍하게’ 여겨지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번 이 사실을 일일이 설명해줄 수는 없어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니요. 나는 입양돼서 행복해요.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닐 테니까요.” 나는 입양인으로서 이 글을 쓴다. 하지만 그보다는 사실 한국인 친구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입양인은 늘 슬픈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여겨졌지만, 나는 다른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입양인을 넘어 각자의 삶을 말할 수 있는 시나리오 말이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안다. 한국 사람들이 웃으면서도 복잡한 심경으로 우리를 대하는 걸. 영어로 뭔가 말하기 전에, 우리를 판단하기 전에, 잠시나마 이런 점들을 생각해 주길. 제니가 한국에서 살겠다고 했을 때 나는 다시 네 살배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의 진짜 색(True Color)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제니가 한국으로 떠난 첫 달은 너무 슬프고 힘들었다. 가족 모두가 그랬다. 린다는 베스트 프렌드이자 사랑하는 언니인 제니가 없는 일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남편은 일과 운동으로 섭섭함을 달랬다. 우리 모두 그렇게 적응하려고 애썼다. 택시는 반포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서 멈춰 섰다. 내가 막 택시에서 내릴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Hej, mama(스웨덴 말로 엄마, 안녕!). 내 몸 안으로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내 사랑하는 딸 제니의 목소리였다. 우리가 한국 친구인 조주희(ABC News 서울 지국장)를 만나러 왔을 때, 그때 제니는 빼빼 마른 소녀였다. 나에게는 두 번째 한국 방문, 제니는 처음이었다. 우린 쇼핑을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즐거워했다. 사람들은 제니의 긴 다리를 가리키면서 너무 예뻐서 꼭 모델이 돼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제니는 일기에 그렇게 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꼭 한국에 가겠다고. 몇 년이 흐른 후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던 제니는 일기에 적었던 다짐을 떠올렸다. 몇 주 후 제니와 나는 다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때가 2008년이었다. 주희가 제니를 모델 회사며 패션 디자이너에게 소개해 모델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줬다. 두 달 후,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하면서 제니는 한국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녀가 입양인의 딸이라는 이유 덕분에(!) 한국 정부로부터 F4 비자를 받는 행운도 누렸다. 그 비자로 제니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제니는 한국 생활을 너무 사랑하며,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을 열린 마음으로 안아주는 이 곳을 고마워한다. 오랜 비행으로 지친 나는 침대에 누웠다. 방문 밖으로 희미하게 스며 나오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다른’ 음식 냄새,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다른’ 언어의 말소리에 대해 생각한다. 이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에 대해 생각한다. 내 나머지 인생 동안 알아야 할 또 다른 세상과 다른 하나는 내가 빚을 진 세상. 제니가 서울로 가면서 내 삶은 큰 변화를 맞았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일했던 광고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흔여섯, 나는 내 회사 ‘Zenex’를 차렸다. 내 뿌리와 지금의 삶을 연결시킬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왼쪽부터) 수잔의 아파트 발코니에선 스톡홀름 거리와 바닷길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지난 해에는 수잔과 남편 보가 한국을 찾아 고궁을 둘러보기도 했다.Sweden, Korea and Fashion나는 스칸디나비아 시장에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서울 리서치 투어를 진행하는데, H&M이 서울 진출을 준비할 때에도 투어를 담당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스웨덴 브랜드를 한국 마켓에 소개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상대적으로 한국의 디자인은 스웨덴에 덜 알려져 있다. 아크네(Acne), 제이 린드버그(J.Lindberg), 칩 먼데이 같은 패션 브랜드들은 한국 시장에 잘 알려져 있는데, 한국의 패션 브랜드는 스웨덴에서 알려진 게 거의 없어 안타깝다. 한국 디자인의 크리에이티브, 서울패션위크 등의 이벤트가 좀 더 알려져야 할 텐데. 스웨덴 패션계는 요즘 퍼(Fur)가 한창이다. 얼마 전 로마 여행을 갔다가 작은 시장에서 근사한 털 목도리를 발견했다. 그레이 컬러가 멋스러운 스웨이드 코트도 건지고. 나는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약간의 트위스트가 있는 클래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빈티지와 디자이너 레이블을 섞어 입고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의 옷을 믹스하길 즐긴다. 요즘엔 레더와 니트를 섞어서 스타일링하는 것에 빠져 있다.스웨덴에서는 럭셔리 브랜드에 대한 생각이 유연하다. ‘명품 브랜드’라기보다 자신과 잘 맞는 브랜드를 선택하고, 저렴한 브랜드의 아이템과 믹스매치하는 걸 즐긴다. 대부분의 스웨덴 여자들은 패션에 대해 굉장히 실용적이다. 너무 실용적이어서 긴장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 메이크업도 마찬가지다. 이곳의 트렌드는 ‘덜 하는 게 예쁜’ 쪽이다. 다들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최고라고 믿는다. 나 역시 ‘빠르고 간편한’ 메이크업에 익숙하다. 클렌저로 세안하고 매일 데이 크림과 몇 가지 셰이드의 미네랄 파우더가 전부다. 요즘엔 조금씩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 립글로스를 쓰고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스킨케어에 관해 여자들이 관심이 대단하다는 점이다. 한국 여자들의 놀라운 피부 결을 보면 부럽다. 한편으로는 그 피부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까 싶기도 하다.Same Soul서로 다른 두 문화를 오갈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축복 받았다. 하지만 그게 결코 쉽지는 않다. 한국 사람들은 때로는 언어 장벽 때문에 나와 함께 있는 걸 불편해하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알기도 전에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는 정말이지 안타깝다. 열려 있지 않은 마음과 직접적인 반응이 없다는 것이 내겐 가장 힘든 부분이다. 물론 유교 사상과 전통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결과라는 건 알고 있지만 스웨덴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정반대다. 나는 직접적이고 명확한 소통과 대화법만이 신념을 잃지 않고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전통과 교육을 고수하고 있는 문화권에서 온 사람이다. 실제로 나는 사적이나 일적으로 이런 소통 방식으로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다행히 나는 지금까지 마음이 따뜻하고 이해심이 깊은 한국 친구와 동료들을 만나 행운을 누리고 있다. 한국 여자들은 나에게는 또 다른 ‘공부’ 대상이다. 너무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을 존경한다. 어떤 때는 혼란스럽기도 하다. 한국 여자들 사이에는 가족만큼 강한 여자들만의 ‘시스터후드(Sisterhood)가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친구의 무리에 새로운 사람이 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폐쇄적일 때도 있다. 그런 점이 나와 같은 외국인이 한국 여성과 친밀한 친구 관계를 쌓는 것을 어렵게 한다. 때로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일 뿐 진정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든, 어떤 계층이든,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친구가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스웨덴 사회를 한국 사회가 조금만 닮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있다.제니와 함께 명동 거리를 걷는 동안 해가 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본다. 나는 내 피부색이 좀 검은 탓 때문이려니 한다. 한국 사람들은 희고 고운 피부를 선호하지만 스웨덴에서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아름답다고 또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내 피부는 한국 기준에서 보면 꽤 검은 편이다. 명동 H&M 스토어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는 거리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흘끔거리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은, 부러움에 찬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제니였다. 나는 기분 좋게 스토어에 들어섰다. 내 딸 제니는 엄마가 태어난 나라에서 자신만의 ‘집’을 찾았고, 나 역시 ‘내 나라’를 세상에 연결하는 일을 시작하겠다던 내 꿈을 이루고 있다. 둘 다 원하는 색깔을 찾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2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