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던 보이의 내면 일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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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약속도, 마땅히 갈 곳도 없이 경성 시내를 배회하는 한 모던 보이의 내면 일기. 작가 자신이 분신처럼 매복해 있는 구보 박태원의 중편소설 은 작가라면 한번쯤 다뤄보고 싶은 매력적인 텍스트다. 과 ,등을 통해 1930년대 서울을 미시적으로 탐구해온 극작가 겸 연출가 성기웅이 드디어 이 소설을 찜했다.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라는 꽤나 아카데믹한 이름의 극단을 이끌고 있는 그는 오랫동안 1930년대 언어와 화법을 재현하는 작업에 열중해왔다.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옛 서울 특유의 쫄깃한 말씨는 그의 전매특허다.몇 년 전부터 한국의 공연계에도 장르 융합을 통한 다원적 예술이란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르와 장르를 물리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최신 경향의 전위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번에 소개되는 은 텍스트,영상,음향,조명을 다각도로 이용한 일종의 실험극으로, 그간 남발되어온 다원 예술의 개념을 갱신한다. 흔히들 언어보다는 비언어 퍼포먼스가, 글보다는 이미지가 전위와 실험의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공연은 낡고 후진적인 것으로 취급되던 언어와 문학에서 다원적 공연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간다. 배우는 때때로 소설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낭독한다(오버랩과 몽타주 기법이 적극 활용된 원작 소설은 사실 그 자체로 '문장실험'의 좋은 소스다). "나이 찬 아들의, 기름과 분냄새 없는 방이, 늙은 어머니에게는 애닯헛다"와 같은 문장이 배우의 입을 통해 통째로 발화된다. 이 과정에서 소설의 문장이나 단어가 품고 있는 함의에 따라 화자가 뒤바뀌기도 한다. 박태원의 생각을 어머니가,어머니의 말을 구보가 대신 말하는 식이다. 심지어 '콤마(.)','피리오드(.)'같은 문장부호가 배우의 입을 통해 전달되면서 소설가의 글쓰기 과정 자체가 노출되기도 한다. 이처럼 원작 텍스트는 분해와 재조립,덧붙이기를 거쳐 다성적으로 발화되면서 그 의미와 재미를 증폭시켜 나간다. 단장을 흔들며 명랑한 걸음으로 옛 서울을 산책하는 꺽다리 소설가는 그렇게 무대 위로, 영상속으로,소설 속으로 떠돌아다니며 관객을 지적으로 희롱한다. 한편 무대 위의 영상은 구보의 산책 코스를 따라 전차에서 끽다점으로, 종로 네거리에서 화신상회로 변화하며 다이내믹한 도시 풍경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일러스트가 활동사진처럼 움직이며 실사를 대체하기도 한다. 여기에 사진, 지도, 신문기사, 만문만화 따위가 주석처럼 끼어들면서 1930년대 서울에 대한 다매체적 탐험이 이루어진다.관객들은 구보와 함께 옛 서울을 일주하며 근대와 전근대가 뒤섞인 당시의 풍경과 풍속, 인간군상의 면면과 조우하게 된다.작품은 근대 초기 서울의 모습과 일제강점기 예술인의 초상을 세밀화로 담아낸다. '명랑을 가장한 우울'이라는 도시적 정서, 요란하지만 고독한 경성 풍경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공감의 장치다. 원작에 대한 해석보다 무대예술의 장르적 실험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은 연출가가 이제까지 선보인 '박태원 시리즈'의 최종편이라기보다 번외편에 가깝다. 두 명의 배우가 구보와 박태원을 나누어 맡아 현실의 작가와 작품 속 작가의 같음과 다름을 절묘하게 드러내며, 그 밖에도 이상, 김기림 등 실존 캐릭터들이 등장해 흥미를 돋운다. 이윤재, 오대석, 양동탁,이화룡,강정임 등이 출연한다. 12월2일부터 3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 111.*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12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