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지금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 2020 F/W 패션 위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2월 말~3월 초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상황에도 곧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 자위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불안정한 상황에 맞서는 가장 막연하고 고전적인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는 상황은 섬유의 이동은 물론 장인의 손길을 멈추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고, 점차 악화되는 팬데믹 속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소식들은 비관적인 뉴스로 점철됐다.
앞으로 패션 위크가 없어질 수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올 무렵, 런던 패션위크가 공식 계정을 통해 오트 쿠튀르와 남녀 컬렉션을 나누지 않은 통합 컬렉션을 디지털 쇼룸을 통해 연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오프라인 타임라인 대로 형식은 유지한 채 플랫폼만 온라인으로 옮겨와 라이브로 진행된 패션쇼는 생각보다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막대한 투자를 하며 드라마틱한 쇼를 열어온 패션 하우스로 향했다. 눈치 게임을 하듯 모두 주춤할 때 가장 먼저 샤넬이 크루즈 쇼를 통해 포문을 열었다. 어슬하게 해 질 무렵 해변의 세트를 배경으로 촬영된 필름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해 주듯 수영복에 겹쳐 입은 트위드 수트부터 가벼운 시폰 드레스까지 드라마틱하게 담겼다.
드디어 샤넬의 디지털 영상이 릴리즈된 후 침묵했던 브랜드들이 입을 떼기 시작했다. 구찌는 S/S, F/W, 크루즈, 프리폴 컬렉션을 두 번으로 줄이고, 생 로랑과 마이클 코어스는 패션 위크 기간을 벗어나 독자적인 쇼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가 하면 스타성을 가진 디자이너들은 SNS로 소통하며 그동안 잠재된 ‘끼’를 마음껏 펼치는 듯했다. 매장을 찾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호스트가 되어 가상의 쇼룸을 열었던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얼마 후 센 강에 크루즈 선을 띄워 이설트(Yesult)의 음악을 배경으로 50명의 댄서들과 함께 춤추며 발망의 75년 아카이브를 담은 오트 쿠튀르 룩을 선보였다. 또 다른 취향의 팬덤을 가진 조너선 앤더슨은 로에베 남성 컬렉션에서 ‘Show in Box’라는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다. 24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개인 공간에서 공연을 펼쳤고 조너선 앤더슨이 페이스 타임으로 예술가, 장인들과 식사하는 장면도 담았다.
이렇듯 디자이너들은 에디터와 바이어, 인플루언서들이 정보와 아이디어, 문화적 정서를 나누던 패션 위크 자리를 어떻게 하면 대신할지 혹은 더 많은 사람과 쇼 문화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디지털 쿠튀르 위크’를 알리는 나오미 캠벨의 짧은 영상이 공개됐다. 드디어 본격적인 디지털 패션 위크가 시작된 것이다. 브랜드들은 옷보다 ‘콘텐츠’를 준비하는 일정에 맞춘 ‘E-초대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영상과 화려한 스태프들이 촬영한 쇼, 아티스트와 협업한 패션 필름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필름은 디올의 오트 쿠튀르 영상이었다. 한 편의 판타지영화를 연상시키는 영상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크리스찬 디올과 프랑스 쿠튀리에들이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선보인 패션 순회 전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테일 오브 테일스〉를 만든 감독 마테오 가로네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님프들과 인어, 나르키소스 조각상 등이 옷을 고르고 치수를 재는 모습을 회화 작품처럼 담았다. 많은 브랜드가 단순히 옷의 디테일을 보여준 반면 옷을 입은 캐릭터에 이야기를 더해 오트 쿠튀르의 본래 취지인 환상과 여운을 남긴 것(15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질 줄이야!). 한편 코로나가 터지기 전부터 준비하던 디올의 크루즈 쇼는 이탈리아 레체에서 무관중으로 오는 7월 22일에 열릴 예정이다.
디올이 판타지영화 같은 영상을 만들었다면 루이 비통은 애니메이션을 더한 맨 컬렉션 영상을 공개했다. 주인공 줌과 친구들이 루이 비통 매장을 털고 항해를 시작하는 내용을 담은 것. 영상은 시리즈물로 제작돼 올해 말 도쿄에서 현실 세계의 쇼로 이어질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브랜드도 눈길을 끈다. 벨루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반 아셰는 세라믹 아티스트 브라이언 로슈포트와 협업해 그의 작품에서 영감받은 룩을 촬영했고, 발렌티노는 사진가 닉 나이트의 사진을 공개하며 7월 21일에 라이브 퍼포먼스를 선보일 것을 예고했다. ‘디지털 패션위크’ 기간 중 가장 쇼에 가까운 방법을 보여준 것은 에르메스의 멘즈 컬렉션 영상이다. 백스테이지에서 분주하게 쇼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모델들이 대기 중 장난치는 모습, 긴박하게 진행된 쇼가 끝난 후 모두 함께 박수를 치며 그시간만의 희열과 허무함이 교차되는 모습을 닮는 등 연출된 다큐멘터리 형식의 필름을 통해 쇼가 일상이었던 순간을 떠오르게 하며 당연했던 것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모든 브랜드가 마치 준비했다는 듯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시스 마잔은 재정 압박을 못 이기고 브랜드를 접는가 하면 소규모 브랜드와 신진 디자이너들이 두각을 나타낸 사례는 아직 본 적 없기 때문이다. 패션 위크가 붕괴된 시기가 되레 신진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를 재기 발랄한 방법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라는 이들도 있지만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다(뉴욕 패션위크는 3일 동안 열릴 2021 S/S 패션위크 기간에 협회 멤버가 아니어도 비용 없이 참가시키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패션 위크가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은 브랜드가 티저 영상, 패션 필름, 비하인드 신까지 공개하며 각자의 패션 위크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디지털 쇼룸을 운영하는 런던을 제외한 나머지 패션협회들은 2021 S/S 패션위크를 온오프라인으로 기간을 축소해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매일 새로운 소식이 업데이트되고 있지만 기존 패션 위크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소규모로 열었던 살롱 쇼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고, 컬렉션보다 뉴스레터에 가까운 자료들이 메일로 오갈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패션’이라는 주제만으로 국경 없이 눈을 마주 보고 아이디어를 교류하던 그때처럼. 최근 릭 오웬스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기억한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어딘가에 약간의 겸손함이 남아 있어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다시 쇼를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