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여자에게 운전 권하는 영화 <반도> #ELLE 보이스

영화 속 그녀처럼 '타요!"라고 외치기 위해 운전대를 다시 잡기로 결심했다.

BYELLE2020.07.27
 
만 열여덟 살 때 면허를 땄다. 곧 면허를 딴 지 20년이 되는데, 면허증은 신분증으로만 쓴다. 살면서 운전이 필요한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도 없었다. 영화 〈반도〉를 보기 전까지는.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반도〉는 〈부산행〉으로부터 4년 뒤의 이야기로,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식의 영화 설명은 넘어가자. 나에게 〈반도〉가 어떤 영화인지 말하라면 이렇게 쓰겠다. 〈반도〉는 여자들에게만 세계의 운전대를 맡기는 영화다. 대부분의 인구가 좀비가 된 과거의 한국, 현재의 반도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만 살아남아 있다. 영혼이 죽어버린 가짜 군인 무리, 아니면 들개라고 불리며 겨우 각자도생 중인 가족 단위의 공동체다. 식량과 생필품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에게 자동차는 좀비와의 전쟁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생존 기지다. 전 세계 그 어떤 좀비보다 빠르다는 K-좀비를 달리기로 떨쳐낼 수는 없기에 텅 빈 도로와 자동차의 존재는 열차 안과 밖에서 달리고 또 달려야 했던 〈부산행〉과 〈반도〉의 액션을 나누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영화 〈반도〉 스틸 컷.

영화 〈반도〉 스틸 컷.

 
이런 상황이니 영화의 치트 키이면서 생존의 방향 키가 돼주는 이 자동차의 운전대를 누가 잡는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 〈반도〉는 중요한 선택을 보여준다. 운전은 무조건 여자가 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 반도로 돌아오는 ‘정석’ 일행 중 단 한 명뿐인 여성은 한국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했던 전력이 있다. 인천에서부터 운전대를 쥐고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로 목적지 오목교로 향하는 그 덕분에 영화의 진행도 한층 빨라진다. 다음 운전은 실제로 영화 홍보 과정에서 비밀 무기로 소개된 이레 배우가 연기한 준이가 맡는다. 이야기 속 가장 중요한 미션에서부터 끝까지 운전을 담당하는 건 엄마 민정이다. 가족의 막내인 유진이도 RC카를 운전해 빛과 소리에 민감한 좀비를 따돌린다.
 
이 영화 속에서 운전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중요한 생존 기술이다. 정석이 슬픈 눈을 하고 과거에 얽매여 고개 숙일 때, 형형한 눈빛으로 “살고 싶으면 타요!”라고 외치고 좀비들을 깔아뭉개며 질주하는 건 여자들이다. 자유자재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환상의 드리프트를 보여주고, 다양한 트릭으로 좀비를 유인하고 속이면서 다른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여자들. 내가 〈반도〉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여자들이 운전대라는 생존의 키를 쥔 세계가 폐허가 된 반도에 있었다. 운전대를 꼭 쥔 여자들이 이를 악물고 방향을 바꾸고, 따라오는 괴물이 된 사람들을 밀어붙이고, 좀비를 따돌릴 때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짜릿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
 
정말 위로가 됐다. 여름을 겨냥한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를 보면서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랬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이름을 잃어버린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들에게 잔혹한 일이 끊이지 않던 7월 둘째 주의 한중간에 〈반도〉를 보면서, 소멸한 나라는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더는 한국이라고 불리지 않는 반도에서 남자들은 좀비가 되지 않는다면 미치광이가 되지만, 여자들은 끝까지 제정신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좀비 바이러스든, 코로나  바이러스든, 전 세계 최저 출산율이든, 서서히 소멸로 향해가는 징후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한국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인 나는 머지않아 이 나라가 폐허가 된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어느 정도는 도래해 마땅한 미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여자들은 현재와 직면하고, 좌표를 파악하고, 가야 할 방향을 정할 것이다. 운전대를 잡을 것이다. 〈반도〉는 내게 그런 세계가 생각만큼의 지옥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반도〉를 보고 나온 뒤, 나는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운전을 제대로 하고 싶어졌다. 지난여름 〈엑시트〉의 클라이밍이 그랬던 것처럼 〈반도〉의 운전은 액션을 위한 수단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기술로 보였다. 해외 생활을 경험한 뒤에 돌아와 제일 먼저 수영을 배웠던 것처럼 악력과 근력을 늘리기 위한 운동을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운전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운전을 제대로 배워둔다면 좀비가 나타났을 때 타인의 손에 운명을 맡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준이가 그런 것처럼 구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타요!”라고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끝까지 살아남는 여자가, 마지막까지 운전대를 쥐고 가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달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 그러니 이제 핑계는 그만 대고 운전을 다시, 제대로 배워야겠다. 운전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 내 손에 운전대를 쥐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헷갈려서는 이미 늦기 때문이다. 좀비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당연히 쓸모는 있을 것이고 말이다.
 
writer_윤이나
칼럼과 에세이,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고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콘텐츠 팀 헤이 메이트의 멤버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Keyword

Credit

  • 에디터 김아름
  • 사진 UNSPLASH
  • 디자인 이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