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틴 드레스는 Gucci. 이어링은 Jennifer Fisher.

오간자 드레스는 Mary Katrantzou.

새틴 드레스와 가죽 벨트는 Christopher Kane. 슈즈는 Versace. 이어링은 Bottega Veneta.
산드라 오의 카리스마는 얼마 전 시즌3를 선보인 〈킬링 이브〉에서 한층 도드라진다. 드라마는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과 그녀를 뒤쫓는 MI6 에이전트 이브 폴라스트리(산드라 오)의 쫓고 쫓기는 관계를 그린다. 다양한 살인 기술이 등장하지만 근본적으로 〈킬링 이브〉는 야망에 사로잡혀 망가지는 두 여자, 동시에 최고 실력자인 이들 사이에 불꽃 튀는 교감을 담은 스릴러다. 그러고 보면 산드라 오의 이름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크리스티나 양’ 또한 가시 돋치고 복잡한 여성이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캐릭터만 연기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서사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빠질 수 없는 캐릭터들 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싫으면 싫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먼저 올라야 했죠.” 산드라 오의 말이다.
이 기준을 철저히 고수해 온 그녀가 시즌10을 마지막으로 하차할 때,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에이터이자 총괄 프로듀서인 숀다 라임스는 공개적으로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다. “산드라를 위해 이야기를 더 쓸 수 없다는 게 무엇보다 슬펐어요.” 최근 통화에서도 라임스는 덧붙였다. “빽빽한 메모가 잔뜩 붙은 각본을 들고 제 사무실로 쳐들어와 셀 수 없는 질문을 퍼붓곤 했죠. 미쳐버릴 것 같지만 몹시 행복하기도 했어요. 산드라는 연기할 캐릭터를 고르고, 자신을 그 캐릭터에 집어넣어요. 근사한 역할이나 로맨틱한 역할, 영웅처럼 보이길 원하는 배우는 많아요. 하지만 산드라가 관심 있는 것은 ‘진짜 삶’을 연기할 수 있냐는 것뿐이에요.”
산드라 오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타와에서 성장하는 동안 발레를 배웠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극단에 합류한 이후, 다른 대학의 장학금을 거절하고 스스로 학비를 벌며 몬트리올 국립연극학교를 다녔다. 한 수상 소감에서 그는 자신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과거사를 털어놓았는데, 바로 자신과 부모님의 갈등을 국립연극학교 무대에서 직접 연기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객석에 있던 부모님이 그 모든 걸 관람해야 한 것은 물론이다! 어떻게 그런 배짱을 부릴 수 있냐고 묻자, 산드라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소리 내 웃었다. “나는 항상 배짱이 두둑했어요.”
사람들로부터 항상 연기에 대한 찬사를 듣는 건 어떤 느낌일까? “기분 좋은 일이죠. 특히 제 경력이 수십 년에 달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말이에요.” 자신의 오랜 경력에 대해 농담하는 순간조차 결단력과 자신감이 흘러넘친다. 그의 심도 깊은 연기는 〈킬링 이브〉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드러난다. “코머와 나는 아주 깊이 교감하고 있어요. 서로를 밀어붙일 수 있는 건 엄청난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코머는 자신의 본능에 확신을 갖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이브와 빌라넬은 대등한 야심과 집착을 갖고 있지만, 스타일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빌라넬이 끌로에 정장과 JW 앤더슨 재킷으로 몸을 감싸고 거리를 활보하는 동안 산드라의 이브는 밋밋한 터틀넥과 윈드브레이커를 걸치고 있으니까.
“미칠 노릇이죠! 의상실에 들어가 빌라넬의 옷을 보고 나면 ‘나도 유니클로보다 좋은 옷 좀 입을 수 없어요? 왜 안 되죠?’라고 외치게 된다니까요(웃음)!” 그러나 이 시리즈에서 패션이 갖는 상징성에 대해 말할 때는 진지하다. “항상 과하게 차려입고 다닌다는 설정이 빌라넬의 심리에 대해 말해 주는 게 뭘까요? 언제나 기본적인 색의 옷, 순박해 보이는 터틀넥을 입는 이브의 스타일도 차츰 변화해요. 소재는 물론 라인과 형태까지도요.” 빌라넬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이브는 남성용 대신 여성용 파커를, 오버사이즈가 아닌 딱 맞는 핏의 의상을 택한다. “그래도 모두가 이브가 입을 법한 색의 옷이에요. 여전히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거죠.”
우리가 만났던 3월 초, 산드라 오는 2019년 10월 이후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카네기 홀에서 필립 글래스와 공연하게 됐다든가 새 드라마 〈더 체어〉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는 엄청난 뉴스들이 380만 팔로어가 보는 피드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긴 해야겠죠. 하지만 다음날로 미루게 되고, 그러면 이미 늦은 것 같고…. 그러다 1주일이 지나면 이제 와서 누가 신경 쓰겠어? 이렇게 되는 거죠. 계속 때를 놓쳐요.”
최근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피부색을 보지 않는(Colour-blind)’ 배역에 캐스팅되는 소수 집단 배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특정한 외적 조건을 갖춰야 주연을 맡을 수 있다는 편견이 줄어들면서 유색 인종 배우들 또한 덜 전형적인 역할에 도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오히려 이제 캐릭터의 인종적 배경을 탐구하는 일에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산드라는 말한다. “그런 고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겠죠.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는 흑인 에디터를 떠올려보세요. 그의 문화적 · 인종적 배경에 대한 고민 없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한 사람의 배경이 그가 내리는 선택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 특히 우리 세대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특정 억양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말아요. 지속적인 인종 차별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지 못한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던 그는 지금 벌어지는 변화가 흥분된다고 덧붙인다. “LA 출신 한국계 미국인 특유의 억양이 있거든요. 요즘 젊은 배우들은 자신의 억양 그대로 의사 캐릭터를 연기해요. 억양을 고치려고 애썼던 나와는 다르죠. 변화를 일궈내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세대에 제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 기뻐요.”
역시나 흑인 여성인 숀다 라임스 또한 이 운동의 든든한 지지자다. “〈그레이 아나토미〉 제작진에게는 항상 암묵적인 과제였어요. 항상 우리의 책임을 의식했고, 산드라가 용감하게 나서서 가르쳐준 순간도 많았죠.” 아침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산드라 오는 빈 커피잔을 치우며 연기를 향한 열정을 털어놓았다. “나이가 들면 의미를 찾게 되고, 세계와의 연결을 갈망하게 되죠. 목적을 고민하고요. 그런데 그걸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 인터뷰 이후 산드라 오의 인스타그램에는 〈엘르〉 캐나다 커버 사진, 제인 구달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 업로드됐다. 가장 최근의 포스팅은 ‘#BlackLivesMatter’에 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