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FASHIONABLE GOODBYE
」도대체 왜? 패션계는 한때 막강한 트렌드에 일조했던 이 창의적인 사람들을 방어해줄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환경인가? 우린 피비뿐 아니라 조너선 선더스, 캘빈 클라인의 프란시스코 코스타,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 랑방의 앨버 엘버즈도 잃었다. 브랜드 규모와 크리에이티브의 역할이 점점 기업화됨에 따라 SNS의 ‘좋아요’가 매출로 직결되는 시점에서 성장 목표와 미디어 전환율은 너무 높이 책정됐다. 디지털 캠페인은 엄청난 상상력을 요하고 온갖 컬렉션과 협업 리스트가 넘쳐난다. 브랜드는 문화적 관련성을 잃지 말아야 하니 디자이너들은 마케팅 머신이 될 수밖에 없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이 험난한 길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택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한때 럭셔리 브랜드를 이끌면서 연간 1100만 파운드 이상 벌어들였던 프랑스 디자이너 니콜 파히(Nicole Farhi). 그녀는 지금 누드 조각상에 둘러싸인 채 작업 중이다. 2012년 30여 년간 몸담았던 레이블을 떠난 후 그녀가 몰두해 온 건 예술이다. “사업 파트너였던 스티븐 막스는 회사에서 언제나 짐을 덜어주곤 했죠. 남들이 미니스커트를 만들 때 똑같이 만들라는 압력은 없었죠.” 하지만 새로운 팀에선 달랐다. “회사를 매각한 사람들은 요구사항이 잔뜩 적힌 서류 더미를 들고 왔어요. 우린 너무 많은 드레스와 두꺼운 코트를 만들어야 했죠.” 매각 후 몇 년간 스트레스가 심해졌고 1년에 두 번이 아닌, 적어도 네 번의 컬렉션을 선보이며 세컨드 라인까지 만들어야 했죠. 끝없는 일의 연속이었어요.” 회사를 떠난 후 취미로 하던 조각이 이제 그녀에게는 창의성을 위한 돌파구가 됐다. 영국 디자이너 조너선 선더스 역시 또 다른 창조 활동을 택했다. 2015년, 성공의 정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12년간의 브랜드 사업을 접었다. 또 뉴욕에서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디자인 총괄을 맡은 지 1년 만에 사퇴했다. 놀라운 성장세로 5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는데도 말이다! 매장의 설치물부터 새로운 로고까지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총괄했으며 이 일을 즐겼지만 “디자인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됐다”고 말한다.
“총괄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비즈니스의 특정 요소에 주목하게 됐죠. 물론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소모적이어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 돼버렸어요.” 선더스 역시 다른 분야로 시선을 돌렸다. 2020년 2월, 2년 만의 휴식 끝에 그는 가구 라인을 론칭했다. 트레이드마크인 현란한 컬러 조합과 그래픽 요소는 이제 드레스가 아닌, 의자와 테이블에 나타난다. “내가 깨달은 건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그걸 진행시키는 걸 가장 좋아한다는 거예요.” 상업성과 창조성을 조화시킨다는 건 거대한 창고 속에서 수공 일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늘 패션 산업의 성공은 이 뉘앙스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달려 있었다. 물론 그런 부담이 항상 디자이너의 몫은 아니었다. 이브 생 로랑과 든든한 비즈니스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지안카를로 지아메티를 떠올려보라. 미우치아 프라다와 남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마크 제이콥스와 로버트 더피,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와 동생 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혁신을 지닌 디자이너와 신뢰할 만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조합은 언제나 막강한 파워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패션 헤드헌터 플로리안 드 생 피에르는 “오늘날 패션과 창의성의 관계는 급격히 바뀌었다”고 말한다(그는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포함해 주요 패션 하우스에 디자이너를 안착시키는 일을 해왔다). “디자이너는 이제 패션 디자인 그 이상의 것을 이해해야 하죠. 오늘날에는 창의적인 콘텐츠가 차이를 만들어내니까요.” 드 생 피에르는 창의적인 마케팅을 예로 든다. “이제 브랜드는 거대한 콘텐츠 공장이 됐어요. 브랜드 가치와 혁신적 제품, 대중적 엔터테인먼트가 그 속에 어우러져야 하죠. 패션은 오늘날의 사회와 동조를 이루는 여러 분야의 인재에게 활짝 열려 있어요.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전천후 인재에 관한 것이죠.” 그는 하우스에 합류하기 전 이미 사업가로 뛰어난 감각을 발휘했던 루이 비통의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버질 아블로를 꼽는다.
그렇다면 오직 디자인과 아이디어에 집중하면서 마케팅과 소셜 미디어, PR 전략과 재무제표 등을 다루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선더스와 파히는 다른 분야로 선회했고, 2005년 패션계를 떠난 헬무트 랭은 파인 아티스트, 캘빈 클라인은 인테리어 디자인, 앤 드뮐미스터는 세라믹 아트를 택했다. 오늘날의 패션 산업에 꿰맞추기보다 다른 분야와 자신만의 독립적 접근법을 택하는 디자이너들이 늘고 있다.
“다들 진화하고 변화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고 있어요.” 디자이너 크리스찬 라크르와는 담담하게 말한다. 파히, 선더스, 클라인 그리고 앞선 디자이너들과 마찬가지로 라크르와도 럭셔리 그룹에 브랜드를 매각했다. “그들은 글로벌 브랜드를 원했고 그 점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나에게 패션은 독특하고 남과는 다른 어떤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브랜드를 떠난 후 라크르와는 연극 무대와 발레 의상, 오페라 제작 등에 에너지를 쏟았다. 하지만 이번 시즌 라크르와는 잠시 패션계로 돌아왔다. 2020 S/S 드리스 반 노튼 쇼에서 라크르와를 초대해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고, 디지털 패션 매거진 〈더 비즈니스 오브 패션〉은 ‘이번 시즌 가장 놀라운 협업’이라고 평가했다.
“이 세계를 떠난 것이 슬프지는 않아요. 놀라운 세계지만, 오늘이 나로선 패션계의 마지막 날입니다.” 라크르와에게 이 협업은 상업적 마지노선, 진열할 매장 등 수많은 요소를 신경 써야 하는 부담 없이 오로지 ‘패션’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장 폴 고티에 역시 마찬가지. 2020 S/S 오트 쿠튀르에서 마지막 단독 쇼를 선언한 그는 장 폴 고티에라는 레이블 아래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창조적인 작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첫 번째 주자는 사카이의 디자이너 아베 치사토. 자유로움과 전권은 여전히 오늘날 패션 산업의 창의성을 높이는 원동력이다. 디자이너 마르코 자니니는 20여 년간 로샤스와 스키아파렐리 등의 브랜드를 위해 일했다. 2014년 대형 그룹의 정치적 전략과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키아파렐리를 떠났고, 2019년에는 자기자본의 독립적인 자니니 레이블로 패션계에 다시 돌아왔다.
“우리의 창의적인 본능은 스스로 헤쳐나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에요.” 레이블은 디자이너 역할에 충실하면서 엄격하게 편집된 풍부한 컬렉션으로 매치스패션과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또 다른 주요 브랜드에 합류하는 건 제 위시리스트엔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지금의 내가 어떤지를 물어본다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매치스패션의 패션 바잉 디렉터 내털리 킹엄은 “변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말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기존의 전형적 루트를 따르기보다 서로 다른 방법을 탐구하고 있어요. 저마다 일궈내는 혁신은 끊임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죠.” 패션계를 떠나 다른 분야를 택하든지 아니면 독립 브랜드를 론칭하든지,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의적 매체를 컨트롤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피비 파일로 역시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느린’ 독립 브랜드로 돌아온다고 예고했다. 2006년 끌로에와 2018년 셀린을 떠났지만, 그녀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는 이유는 명백하다. 피비 파일로의 세 번째는 훨씬 더 매력적일 테니.

구찌의 최고 경영자이자 남편 파트리지오 디 마르코와 함께 떠난 프리다 지아니니.

랑방을 떠나 새로운 브랜드를 구상 중인 앨버 엘버즈.

뷰티 사업을 시작한 프란시스코 코스타.

조너선 선더스는 가구 라인을 론칭했다.

가장 절정일 때 셀린을 떠난 피비 파일로.

전설의 쿠튀르에가 된 크리스찬 라크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