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당근마켓을 좋아해! 왜?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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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당근마켓을 좋아해! 왜?

나누는 즐거움과 비우는 보람. 당근마켓이 우리에게 선사한 건 '득템'의 기쁨만은 아니다.

ELLE BY ELLE 2020.07.15
 
나는 매너 온도 44.3℃의 ‘당근마켓러’다. 판매 내역에 오른 20여 개의 물건 중 거래 완료된 물품은 총 14개, 내가 구매한 내역은 26개다.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지 막 4개월쯤 된 걸 감안하면 꽤 활발하게 활동 중인 셈이다. 
 
정말이지 모두가 당근마켓을 한다! 친구와의 메시지 창은 오늘 발견한 이 물건을 사도 괜찮을지 묻거나 이런 물건도 판다며 슬쩍 흉보는(진작 멸종한 줄 알았던 티니위니 원피스나 1회 사용한 프러포즈 이벤트용 세트 같은 것)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새로운 대화 소재가 필요하다면? 당근마켓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얼마를 벌었는지, 아직 해보지 않았다면 대체 왜 안 하는지,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을 테니까! 내 경우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지인 남편 이야기였다. 마치 게임 스탯을 찍듯 36.5℃에서 시작하는 당근마켓의 매너 온도를 100℃로 만드는 데 골몰한 나머지, 더 이상 팔 것이 없자 집 근처 중고 옷 가게까지 기웃거리더라는 스토리다.
 
당근마켓은 기본적으로 ‘중고 직거래’를 위한 앱이다. 당근마켓의 ‘당근’이 ‘당신의 근처’의 줄임말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용자는 자신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을 최대 두 곳까지 생활 반경으로 정할 수 있는데(주기적으로 실제 지역에 방문해 ‘인증’해 줘야 한다), 거래 반경을 제한함으로써 직거래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둔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판매에 들어가는 노력 대비 금전 가치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중고 거래와는 달리, 내 생활권에 잠재적 구매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친근감을 동반한 신뢰감을 선사한다. 동시에 ‘이런 것도 올려볼까?’ ‘어차피 안 쓸 것 나눔이나 할까?’ 하는 마음까지 갖게 만드니! 당근마켓에 무료 나눔이 유독 많은 이유다. 
 
실제로 앱을 어느 정도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도시 미담을 겪게 된다. 직거래 직전, 아이 보행기가 포장 과정에서 파손되는 바람에 패닉에 빠진 자신에게 괜찮다며 한사코 돈을 쥐여 주더라는 후배의 경험담은 아름다웠다. 내 경우에는 입금까지 마친 물품을 무료로 받은 적 있다. 보내기 직전 스커트 안감에 이염이 발견돼(안감 얼룩에 대체 누가 신경을 쓰지?) 드라이클리닝을 맡겼으나 오히려 지퍼에 흠집이 생겨(눈을 부릅뜨고 봐야 발견할 수 있었다)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가 물건 관리에 신경 쓰는 편이라 이건 판매할 수 없어서 그냥 드리려 하니 싫지 않으면 받아주세요….” 당시 받았던 메시지다. 아니, 생면부지의 현대인들이 이런 온정을 나눌 일이 얼마나 있느냔 말이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옷 부자 선배도 내게 지방시 스커트를 무료로 주진 않을 것이다!
 
코로나 이후 미국에서도 이베이를 통한 중고 거래가 빠르게 증가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주일 동안 100만 원 버는 방법’ 같은 팟캐스트도 꽤 많다. 부수입 마련이 주목적인 당근마켓러도 있으며, ‘당근가계부’에 따르면 나도 약 110만 원의 수익을 얻었다. 하지만 수개월간 이 앱이 남긴 건 마음에 드는 ‘중고’ 물건과 용돈만이 아니다. 여전히 내게 의미 있는 물건을 더 나은 주인을 찾아 보냈다는 기쁨이 가장 크다. 예를 들어 보라색 바라 리본이 달린 살바토레 페라가모 미니 체인 백은 26세 때 백화점에서 산 최초의 명품 가방이었다. 서른다섯 살이 된 지금 메기엔 좀 머쓱하지만, 이 가방이 잘 어울릴 누군가가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20대 후반에 좋아했던 브랜드 아크로밧의 메리 제인 구두는 내게 사이즈가 작았지만, 그래도 신고 나갈 때면 항상 기분 좋은 신발이었다. 커다란 굽 때문에 그냥 버리기도 난감했던 신발은 평소 이 브랜드 구두를 꼭 신고 싶었다던 학생에게 전해졌다. 내 체형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던 아크네 스튜디오 원피스와 빔즈 점프수트, 꼼 데 가르송 셔츠도 마찬가지다. 
 
내 옷장에서 의미 없이 존재하던 ‘괜찮은’ 것들이, 새 주인을 찾아 수명이 연장된다는 걸 하나하나 확인하며 물건을 떠나보내다 보면 가끔 1만 원짜리 물건을 팔고 배송료만 5000원을 내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올해 초 헤어진 전 남자친구에게 받았던 물건은 순식간에 팔려 나갔는데(루이 비통과 프라다 지갑 같은 것부터 하다못해 보세 브랜드의 떡볶이 코트, 스타벅스 프리퀀시 굿즈까지) 그럴 때면 개운함과 묘한 안도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누군가에게 여전히 돈 주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우리가 주고받았다는 게 ‘나쁘지 않은 관계를 가지셨군요’ 같은 증표처럼 느껴졌달까.
 
판매할 만한 물건들을 찾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집 정리도 하게 됐다. 각각의 물건이 어떤 주인을 만날지보다 버리는 게 우선이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내 물건을 바라보게 된 덕분이다. ‘왕자 행거’를 처분하고 염원하던 슬라이딩 장을 마련해 물건을 재정비한 요즘처럼 집이 쾌적하게 느껴진 적 없다. 원하던 의자들을 구하면서 몇 년 동안 다리가 흔들린 채로 방치된 이케아 의자 두 개를 내다버렸다. 수년 전 곤도 마리에가 미니멀리즘을 외칠 때는 그닥 와닿지 않았던 비워내는 기쁨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단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그의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긴 하다. “여전히 설레는 물건이 있다면 당근마켓에 올려보라.”
 
가장 큰 수확은 드디어 패스트 패션 브랜드를 소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 의류 생산과 폐기 과정이 환경은 물론 생산공장이 있는 지역민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의류 소비 사이클을 급속도로 빠르게 만든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내놓은 ‘지속 가능한’ ‘친환경’ 라인들이 얼마나 기만적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었다. 그러나 세일 기간 SPA 브랜드 매장을 들르지 않는 일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다행히 당근마켓에는 정말 괜찮은, 수많은 내 취향의 물건들이 있었다! SPA 브랜드 컬렉션 라인을 살 돈으로 질 샌더 재킷을 살 수 있다면, 비슷한 디자인의 카피가 아니라 실제 나이키×사카이 스커트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심지어 이 옷들이 훨씬 편안하기까지 하다면 왜 마다하겠는가? 
 
정치학을 전공한 코미디언 하산 미나즈의 넷플릭스 쇼 〈이런 앵글〉이 패스트 패션을 다룬 에피소드에 따르면, 옷 한 벌을 9개월 더 입는 것만으로도 탄소발자국을 30%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새 옷 대신 중고 옷을 사면 2.7kg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드는데, 이는 50만 대의 차가 한 해 동안 도로에서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효과다. 빈티지 의류를 사는 것만으로 훌륭한 세계 시민의 자질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지난 석 달간 SPA 브랜드에서 아무것도 구입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경험이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불쾌한 경험담도 종종 올라오며, 앱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전문 판매업자의 글이나 동물 분양 글같이 규칙에 어긋나는 글이 눈에 띄기도 한다. 하지만 당근마켓은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며 나와 주변으로 한정돼 있던 일상의 폭을 넓혀준다. 한두 시간 늦추는 것도 거절하고 낮 시간대 거래를 고집하던 구매자를 다소 의아해하며 직거래 장소로 나갔던 친구가 만난 것은 전동 휠체어를 탄 중년 여성이었다. “조금만 어두워져도 이동이 힘든 분이었던 거지. 헤어 스타일러를 구매했기에 어린 여자애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내 편견이었어.” 친구의 말이다. 
 
미혼인 내 경우에는 ‘아이를 낳고’ 예전처럼 높은 굽을 신을 수 없게 됐다거나, 체형이 변해 판매한다는 수많은 글을 보면서 출산이 여성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감하고 있다. 어젯밤, 내 사이즈의 스텔라 매카트니 슈즈를 발견하고 클릭했던 판매자의 제품 설명글은 마음을 울렸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일할 때 산 신발이에요. 평생 그렇게 재미나게 살 줄 알았는데 뭔가 힘이 넘쳐야 하거나, 단순한 것들은 결국 다 시들해지더라고요. 나이 먹는 것 중에 좋은 건 이런 것 같아요.” 크으, 가장 개인적인 소지품들을 거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삶이 이어지는 방식은 이토록 예상보다 재미있고 다양하다. 비록 그 신발을 사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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