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새로운 상점>을 제대로 음미하는 법 || 엘르코리아 (ELLE KOREA)
CULTURE

전시 <새로운 상점>을 제대로 음미하는 법

치밀한 사유로 직조된 미학적 층위. 제18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 전소정 작가와 함께 그 속을 거닐었다.

ELLE BY ELLE 2020.06.19
 
영상 〈절망하고 탄생하라〉를 중심으로 설치된 구조물. 이번 전시는 7월 5일까지 이어진다.

영상 〈절망하고 탄생하라〉를 중심으로 설치된 구조물. 이번 전시는 7월 5일까지 이어진다.

전소정, ‘Storage’, 2020

전소정, ‘Storage’, 2020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는 전소정 작가의 개인전 〈새로운 상점 Au Magasin de Nouveautes〉 은 얼핏 근미래의 상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시 가설물 중앙에 자리 잡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모니터에는 인왕산 선바위를 쇼핑 품목으로 제시하며 시작하는 25분 길이의 영상 작품 〈절망하고 탄생하라〉(2020)가 재생되고 있다. 이를 중심축으로 페트병과 지구본, 빨대 등으로 만든 기이한 오브제와 사방에 거울을 단 유리 박스 안에 보관된 조각 그리고 한쪽에 마련된 출판물이 관람자의 느린 걸음을 인도하며 전시를 구성한다. 지난 2018년 12월,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 발표 이후,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4개월간의 파리 레지던시 경험을 통해 전소정 작가는 밀푀유처럼 치밀한 레이어로 이뤄진 이번 전시를 선보였다. 오프닝 전날 작가와 함께 그 아름다운 층위를 음미해 보았다.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이상의 시 〈Au Magasin de Nouveautes〉이다. 먼저 이 시에 대해 소개를 부탁한다 한국 근대 아방가르드의 표상이었던 문인이자 건축가 이상의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1932) 중 표제작으로 프랑스어 제목에 일본어, 고전 한자어, 중국어, 영어를 혼용해서 썼다. ‘사각의내부의사각의내부의사각의내부의사각의내부의사각’으로 시작하는 시의 모티프는 1930년 경성에 문을 연 미쓰코시 백화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선에 자본주의를 이식하려는 일본에 의해 지어진 백화점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근대 자본주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슈를 재고해 보는 하나의 장치이자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봤다.  
 
파리 레지던시 경험은 이상의 시로 촉발된 이번 전시 주제와 관련이 있나 파리 레지던시에 체류하던 지난여름, 기상이변으로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다. 유럽의 여름은 비교적 선선해서 어디에도 에어컨이 없으니 모두 무방비 상태로 온종일 더위에 시달렸는데, 그러면서 가속화되는 자본주의를 탓하는 사람도 있고, 기후변화도 얘기하고 그냥 넋이 나간 사람도 많았다(웃음). 미술계에서도 지난 몇 년간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가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인류세가 주요 주제로 다뤄지고 있지 않나. 그 열기를 느끼며 한국의 모더니티, 진보에 관한 질문이 겹쳐 보였다. 1930년대 초의 초현실주의자 루이 아라공이 당시 새롭게 지어진 백화점 때문에 과거의 유물이 돼버린 오페라 파사주의 이미지들을 콜라주하며 19세기 근대자본주의나 대도시의 현재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소설, 이상이 시를 통해 근대의 문화 식민주의에 대한 혐오와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 시도가 겹쳐 보였다. 그런 담론 사이로 도시에서 벌을 키우고 옥상에서 재배한 식물을 가지고 요리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면서 일상의 작은 실천이 현실 세계에 파열음을 내고 탈주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위적인 시에서 출발한 이번 전시는 영상과 임시 구조물, 조각 등으로 다층적으로 구성돼 있다. 난해함을 느낄 수도 있는 관람자에게 팁을 준다면 전시는 영상 〈절망하고 탄생하라〉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통로면서 탈주로, 미로, 파사주, 가벽 그리고 상점의 매대 역할도 하는 다용도 구조물 사이사이에는 조각 ‘Organ’과 ‘스토리지’, 출판물 〈ㅁ〉이 놓여 있다. 아방가르드 역사에서 주요 전략이었던 산책을 실제로 체험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해진 동선이 없는 구조물을 설계해 놓았으니 자유롭게 걸으면서 그 사이사이에 있는 조각과 영상, 책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각 작업은 긴밀하게 연계돼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별적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퍼즐 맞추기를 할 필요는 없다.  
 
영상 〈절망하고 탄생하라〉는 이상의 시를 프리즘을 통해 증폭한 것과 같이 서울이나 도쿄, 파리의 지하철, 공원, 누군가의 집 등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시간 축, 공간 축이 뒤섞이는 가운데 눈길을 잡아 끄는 건 인왕산 선바위를 비추는 화면에 정원 장식용품으로 좋다는 성우의 제품 정보 내레이션이다 이 영상에는 풍경에 대한 은유가 등장한다. 도심에 인접해 있지만 한 걸음만 들어서면 혼돈의 풍경이 펼쳐지는 인왕산 선바위와 그 주변을 보라. 선바위의 기이함과 위용은 지금도 치성을 드리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그곳에 있는 국사당 안에는 이성계, 무학대사 같은 역사적 인물과 신령들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 신으로 추앙받는다. 선바위라는 존재 자체가 내뿜는 ‘하이브리드성’, 그것이 한국 현재의 모습이 아닐까. 이상의 시에서 느껴진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반원근법적 사유의 가능성을 영상으로 말하고 싶었다. 시간 축을 계속 이동하면서 소리와 이미지를 분리해 간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이번 전시에는 출판물 〈ㅁ〉도 작품의 하나다 〈ㅁ〉이라는 제목은 시의 주된 이미지인 반복하는 사각형에서 유래하지만, 한자로는 입구(口)이기도 하고 한글에서는 ‘미음’ 혹은 네모난 무대, 스크린일 수도 있다. 이 시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영역에 조응해 건축과 미술사, 수학, 음악, 언어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 11명이 참여하여 이상의 시를 매개로 현재를 바라보는 데 유용한 시각을 제시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출판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다행히 파리에 체류하면서 다양한 국적의 연구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이상의 시가 지닌 다언어적이고 다영역적이기도 한 레이어를 다국적 참여자들과 연구하면서 해석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었다. 참여자들은 각자의 모국어와 각 분야의 특수 언어(건축 도면이나 악보)로 다양한 결과를 보내주었고, 그걸 편집하는 과정에서 원문과 번역본을 나눠 제작했다. 두 가지 버전의 출판물이 나왔는데, 하나는 필자들의 원래 제스처에 가까운, 그들이 보내준 것을 스캔하다시피 해 원문을 번역도 하지 않은 상태로 실었고 다른 버전은 번역본이다. 여러 언어를 혼용한 이상의 시처럼 번역의 문제도 다루고 있는 프로젝트다. 
 
개인적으로는 〈절망하고 탄생하라〉 영상 후반부에 파리와 서울에서 ‘파쿠르’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파리 외곽에서 시작된 파쿠르는 도시의 지형지물을 신체를 통해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개인 훈련인데 그들을 따라 도시의 위험한 곳을 열심히 찾아다녔다(웃음). 그들에게 이 활동은 두려움의 대상을 극복하는 심리적이고 철학적 활동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파리와 서울에서 파쿠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건 도시 안에서의 움직임, 탈주의 모티프로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들은 수직·수평으로 도시를 이동한다. 근대의 원근법적인 움직임과는 다른 수직·수평의 이미지들을 파쿠르가 만들어주었고, 여기에 가야금과 하프의 협주곡이 삽입된다. 동양과 서양의 상징적인 악기를 통해 이미지적으로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를 청각화해 전달해 보고 싶었다. 
 
지난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 역시 심대한 리서치가 바탕이 된다. 전시를 개막했으니 당신의 좌표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영상 〈절망하고 탄생하라〉의 제목은 이상의 연작시 ‘삼차각설계’(1931) 중 ‘선에 대한 각서 2’ 마지막 시행에서 따온 것이다.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절망하라.” 이 구절은 예술가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이 자기 형식이나 미학을 구축해가는 긴 과정 속에서 어느 단계에서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부수고 전혀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아간다. 전시를 개막한 지금은 이미 다른 프로젝트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스페인의 ‘한 네프켄(Han Nefkens)’ 비영리재단과 윤이상의 음악에 관해 여러 작곡가들과 협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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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컨트리뷰팅 에디터 안동선
    사진 KIM S. GON
    디자인 온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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