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이트 수트와 베스트는 모두 s/e/o by Heights. 블랙 샌들은 Zara.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베이스스토리’는 어떤 회사인가 모든 작품의 시작이 되는 원천 소스, ‘이야기에 기반했다(Based on Story)’는 의미다. 굉장히 직관적인 이름인 셈이다(웃음). 2017년 설립했고, 기획 프로듀서와 웹툰 프로듀서, 웹툰 작가와 프리랜스 드라마 작가로 이뤄져 있다. 우리가 기획 개발한 작품을 공동으로 작업할 역량을 가진 제작사를 만나 영상화하는 작업까지, 콘텐츠 개발을 할 수 있는 회사가 되는 게 목표다.
나를 소개한다면 영상, 문학, 만화 등 장르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재미있는 것을 모두 찾아보는 사람이다. 작품을 보는 동안 현실을 떠나 환상 속에 빠질 여지가 있는, 세계관이 확장된 작품에 좀 더 관심이 간다.
원래 어떤 일을 했나 영화·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로 일을 시작한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제작팀과 투자사, 시나리오 개발 팀 등 다양한 영화 관련 일을 하다가 드라마 제작사 기획 팀에 입사했고, 첫 작품이었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운 좋게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드라마에서 프로듀서로서 역할의 한계를 깨달았다. 당시만 해도 드라마의 대본은 온전히 작가 한사람에게 의존하는 구조가 절대적이었다.
그게 지금 작업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됐나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환경이 형성됐다. 방송국 위주의 레가시 미디어를 넘어, OTT(Over The Top) 시장이 확대되면서 전세계 시청자를 동시에 타겟팅 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할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 어필할 수 있고, 특정 연령과 성별에 특화된 아이템을 개발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 넷플릭스 〈킹덤〉 〈인간 수업〉, tvN 〈아스달 연대기〉 같은 작품은 글로벌 시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템 경쟁이 심화되고, 제작을 고려할 수 있는 작품 폭이 넓어지면서 검증된 원작, 이야기를 향한 수요와 함께 기획 프로듀서의 역량과 역할이 커지게 됐다.
현재 작업 중인 작품은 웹 소설을 웹툰화해 좋은 반응을 얻은 〈장씨세가 호위무사〉(이하 〈장씨세가〉)의 영상화 작업, 〈마른 가지에 바람처럼〉의 웹툰 작업을 진행 중이다. 김수현의 복귀작으로 한창 촬영 중인 〈사이코지만 괜찮아〉 제작에 참여 중이고, 기획과 대본 개발을 담당한 BBC 원작 드라마 〈언더커버〉 리메이크 드라마가 촬영을 앞두고 있다. 그 외에도 3편의 웹툰과, 오리지널 드라마,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를 개발 중이다.
웹 소설을 웹툰화하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방송국과 파트너 사에서 웹 소설 원작을 검토하는 데 확실히 장벽이 존재한다. 〈장씨세가〉만 해도 책으로 15권에 달하니까. 웹 소설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 쉽게 읽히지 않는 면도 있다. 웹툰화가 반드시 영상 작업을 위한 중간 과정은 아니다. 웹툰을 보고 원작 웹 소설을 찾는 이가 생기기도 하고, 원작 팬이 자신이 좋아하던 이야기가 웹툰이나 영상물로 제작됐을 때 호기심을 갖고 찾아보는 콘텐츠의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장씨세가〉 또한 웹툰이 연재된 이후 다시 원작 붐이 일었다.
여러 소스 중에서 웹 소설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웹 소설 시장의 저력을 알았을 때 주변의 드라마 작가들에게 다 웹 소설 쓰라고 했을 정도다(웃음). 네이버와 카카오페이지, 문피아, 조아라 같은 주요 플랫폼에 매일 업로드되는 소설이 2만 편에 달한다. 작가와 독자가 만나기까지 제작 과정이 간소화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의 유명세보다 작품 자체의 재미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시장이 커지며 작품 수준도 전반적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한 회 분량이 6000자 정도 되는 웹 소설의 인기는 유튜브 영상이나 틱톡 같은 ‘숏폼’ 콘텐츠의 인기와 비슷한 맥락으로 세계적인 현상이다. 요즘 중국에서 성공을 거둔 드라마 중 웹 소설 원작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다.
매체 구분 없이 다각적으로 일하고 있다 콘텐츠 경쟁력이 심화되는 지금, 기획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드라마 제작과 기획의 경계가 명확하기 어려운 한국과 달리 외국의 경우 기획, 개발, 제작, 작가… 모든 분야가 세분화·전문화 돼 있다. 내가 발굴한 두 명의 작가와 함께 작업한 대본이 4화까지 나온 상태에서 제작사와 협력해 편성이 결정된 JTBC 드라마 〈언더커버〉가 크리에이터로서 베이스스토리를 보여주는 첫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크리에이터라는 용어 사용이 굉장히 조심스럽기는 하다. 웹소설과 웹툰, 드라마를 막론한 콘텐츠 크리에이터지만 현재 한국에서 크리에이터라는 호칭은 유명 감독과 작가를 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지금 말한 크리에이터의 역할이 국내에도 유효할까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은 굉장히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근간에 대본이 있다. 작가의 재능과 별개로 한 사람에게 대본을 온전히 기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미권과 중국 등 해외에서 수많은 프로듀서들과 4~5명의 작가가 협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유다. 시즌제와 제작 시스템의 안정화 등 콘텐츠들의 규격이 전 세계적으로 비슷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 좋은 방향성을 제안하는 기획 프로듀서, 크리에이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작품에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는 않는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경우 훌륭한 작가 옆에서 조언자의 역할에 머문다.
크리에이터로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작가는 기본적으로 아티스트이기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방향성, 보편적인 전달 방식 등에 대해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작품을 보는 수밖에 없다. 해외 작품은 물론 막 편성된 작품의 대본까지 미리 구해 보려고 하는 이유다. 풍부한 레퍼런스를 갖고 접근하지 않는 이상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외 마켓이 한국의 콘텐츠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느끼나 리메이크를 위해 해외 작품의 판권을 사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이 작품을 한국에서 리메이크해 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먼저 들어올 정도다. 작품 수준이 기술적으로 어느 정도 보장될 뿐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거점 역할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류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한국 배우들이 명성을 얻는 것과 별개로 한국에서 만든 원작의 힘 자체를 인정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같다. 지난해 영국 BBC 쇼케이스를 다녀왔는데, 자신들이 만든 이야기가 당연히 전 세계에 받아들여질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최종 포부는 일단 지금은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더 많은 사람과 만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반지의 제왕〉〈트와일라잇〉 같은 작품을 우리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인〈마른 가지에 바람처럼〉은 7~8월 즈음웹툰을 연재하고, 이후 영미권에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도록 원천 소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한국에서 탄생한 이야기라고 해서 꼭 한국에서 제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외국 프로덕션과 손잡고 제작할 수 있는 시장과 가능성이 열렸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 그 자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