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감상법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과연 저게 예술일까?'하는 의문은 현대미술과 만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의례일까, 아니면 우리가 뭔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걸까? 어찌 됐든 "현대예술이 다 그렇지","포스트모던이란 게 원래 저런 거야"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고 싶지 않다면, 관객은 뭔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개빈터크,스타일리시한,멋진,개성있는,전시회장,갤러리,미술관,전시,관람,루브르 미술관,예술,현대미술,감상법,감상,엘라서울,엘르,엣진,elle.co.kr:: | ::개빈터크,스타일리시한,멋진,개성있는,전시회장

1 Gevin Turk, Beuys in Orange and Violet,20052 Gevin Turk, Silver Negative Beuys,2005‘과연 저게 예술일까?’ 하는 의문은 현대미술과 만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의례일까, 아니면 우리가 뭔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걸까? 어찌됐든 “현대예술이 다 그렇지”, “포스트모던이란 게 원래 저런 거야”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고 싶지 않다면, 관객은 뭔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아니라면 굳이 미술관까지 가서 혼란에 빠질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마틴 크리드가 휴지를 유리관에 넣고 그 위에 뻔뻔하게 작품 번호를 매긴다 해서 그것을 무조건 지적 허영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작업을 비판할 때는 보다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다.일찍이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워홀의 ‘브릴로상자’가 일으켰던 파문처럼, 1991년 영국왕립예술대학 졸업전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야심으로 가득 찬 젊은 작가 개빈 터크는 텅 빈 스튜디오 안에 ‘개빈 터크/조각가/여기서 작업하다 1989-1991’라고 쓰인 둥그런 명판 하나만 설치해 놓고 작품이라고 우겼다. 이름하야 ‘동굴(Cave)’이다. 덕분에 그는 학교 역사상 최초로 학위를 받지 못한 학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력을 갖게 됐다. 하지만 터크는 지도 교수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대신 미술계의 주목을 단숨에 끌었다. 아트 딜러 제이 조필링의 눈에 띄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찰스 사치의 전(1997)에 참여해 yBa의 일원이 되었다.터크의 모험을 괴짜의 똘기나 선배 예술가들의 아이템을 도용한 키치라고 평가 절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가능성을 ‘텅 빈’ 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스튜디오의 ‘텅 빔’에서 의외의 의미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이안 리더가 (2002)에서 1911년 사라진 ‘모나리자’의 빈 공간을 보기 위해 루브르 미술관에 모여든 인파를 예로 들어 설명했던 것과 흡사한 성격의 교훈을 전해준다. 작품의 가치는 보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말이다. 일찍이 지젝은 쓰레기나 배설물이 오브제로 범람하는 미술계를 구원하기 위해, 작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를 주의 깊게 볼 것을 권고했다. 현대미술 작품을 두고 쓰레기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은 작품과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 사이를 분리, 재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젝이 보기에 예술가는 작품과 장소 사이에 최소한의 틈새를 남겨두려고 애쓰는 존재다.현대 미술에 있어서 장소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론적 해석이다. 터크가 1990년대에 보여준 일련의 작업들은 평범한 재현처럼 보이는 비주얼로 작품과 비작품 사이를 오간다. 씹다 만 껌을 크게 확대하여 벽에 붙여 놓은 듯한 ‘PK1’, 검은 쓰레기봉투를 브론즈 캐스트에 채색하여 재현한 ‘덤프’ 등이 그렇다. 지식인들은 흔히 승화나 낯설게 하기 효과를 들먹이며 터크 류의 현대적 시도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것은 학습된 지식에 불과하다. 아서 단토 식으로 말하자면, 평범한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바꾸는 것은 그 대상에 더해지는 이론적 해석이다. 터크는 종종 유명 스타로 변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소재로 작업하는데, 그의 대표작 ‘팝(Pop)’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자신이 직접 펑크 록 스타 시드 비셔스(‘섹스 피스톨즈’의 멤버)로 변장해 앤디 워홀의 작품 속 엘비스 프레슬리 포즈로 노래 부르는 모습을 실물 크기의 밀랍인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도(미국 팝아트의 영향)를 모른다면 그저 평범한 인형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1993년 터크의 아이콘이 된 이 작품이 오늘날 한국의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받게 될까? 그저 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화석의 동방 나들이쯤으로 치부될까? 아니면 또 다른 신화를 구축할까? 적어도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영국의 미디어와 예술계의 동상이몽이 만들어 낸 지적 사기는 이제 유통기한이 다했거나, 이 땅에서 작가조차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거나. 그것은 온전히 한국 관객들의 몫이다. 으레 터크의 작품들은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요소를 내재한 사물의 이중성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작품이 있는 장소, 그리고 이론적 해석. 그 사이에서 최소한의 틈새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아직 남아 있다. 설령 우리가 본 것이 예술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대미술 작품과 능동적으로 만나는 관객의 태도는 ‘예술적 행위’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12월 12일까지, 박여숙화랑.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12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