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 비통 재단에서 진행된 〈샬로트 페리앙의 신세계(Le Monde Nouveau de Charlotte Perriand)〉 전시. © FONDATION LOUIS VUITTON
작년 말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 출장 차 방문한 파리. 촬영과 미팅 등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시간을 내 들른 곳은 루이 비통 재단이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서, 20세기 모더니즘 디자인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샬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 서거 2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 샬로트 페리앙이 누구던가. 르 코르뷔지에나 피에르 잔느레 같은 근대 건축의 대표적 인물들과 한 팀에서 일한 여성이자, 사회가 요구하던 여성의 역할에 과감히 ‘NO’라고 말할 만큼 근대 사회의 흐름을 명확히 꿰뚫어본 선지자이자 혁명가 아니던가.
전시는 페르낭 레제의 그림을 배경으로 그녀의 대표작 〈포퇴이 피보텅(Fauteuil Pivotant)〉 의자가 배치되어 있는 풍경에서 시작돼,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LC 2 와 LC 3 소파, 그리고 LC 4로도 잘 알려진 〈셰이즈 롱(Chaise Longue)〉 등으로 이어졌다. ‘여성 해방’을 암시한 개방형 키친과 크롬, 유리, 알루미늄 등 공업용 소재를 사용해 그녀가 전개해 나간 실용적인 모더니즘의 효시로 평가받는 생쉴피스(Saint-Sulpice)의 아파트 주방 공간도 엿볼 수 있었다. 그녀가 늘 목에 차고 있던 산업용 볼 베어링으로 만든 목걸이는 모던함을 지향하는 그녀의 디자인 세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토템’과도 같았다는 사실.

샬로트 페리앙의 디자인 스케치. © ACHP/ADAGP 2020

샬로트 페리앙의 〈셰이즈 롱(Chaise Longue)〉. © ACHP/ADAGP 2020
에디터의 시선을 잡아 끈 공간은 1940년대에 접어들어 그녀가 일본의 문화를 경험한 뒤 전개한 디자인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자연친화적인 재료, 일본 현지에서 보고 느낀 그들의 장인정신과 전통 기술을 결합한 간결하고 모던한 가구 디자인들은 한국인인 에디터에게도 너무나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떠 오른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솝의 갈색 보틀들. 동양의 문창살을 연상케 하는 〈캔사도 벤치(Cansado Bench)〉 위에 이솝의 갈색 보틀을 올려놓으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517 TOKYO OMBRA CHAIR. © ACHP/ADAGP 2020
그렇게 감동에 감동을 받으며 서울로 돌아왔고, 약 5개월이 지나 이솝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샬로트 페리앙의 삶과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네 번째 향수, ‘로즈 오 드 퍼퓸’이 출시된다는!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 연결고리가 혹시 시향할 때 색안경이 되지 않을까 선입견은 철저히 배제한 채 향을 맡았다. 개인적으로 남성성이 물씬 풍기는 오리엔탈 우드나 우디 머스크 계열을 선호하는 탓에 한국 여성이라면 대부분 좋아하는 꽃과 과일 향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곤 했음을 고백한다. 꽃 중에서도 ‘장미’ 향이라면 바로 진실의 미간이 작동해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 하지만 이솝의 장미 향은 달랐다. 가공된 장미 꽃의 향이 아니라 장미 꽃잎부터 줄기, 이파리, 가시, 흙과 뿌리까지 모두 다 담은 듯한 풍부하고 편안한 자연의 향에 가까웠기 때문. 여기에 에디터가 무척이나 편애하는 패출리, 머스키 노트까지 녹아있어 전형적인 장미 향수와는 차원이 다른 향을 선사하고 있었다.

이솝 로즈 오 드 퍼퓸. © ACHP/ADAGP 2020

꽃잎부터 줄기, 가시, 뿌리를 내리고 있는 흙까지 장미의 생명주기를 모두 담고 있는 이솝 로즈 오 드 퍼퓸. © ACHP/ADAGP 2020
“샬로트의 삶과 성격에는 20세기의 복잡했던 시대상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사실 장미도 똑같이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즈 오 드 퍼퓸을 탄생시킨 이솝의 ‘코’, 조향사 바나베 피용(Barnabe Fillion)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와 같이 설명하며 “일본을 향한 샬로트의 애정과 그녀가 탐험하기 좋아했던 상쾌한 알프스 산맥을 상징하는 시소, 그녀가 즐겨 사용한 전통적인 남자 코롱, 페리앙이 함께 작업한 목수들의 작업장을 암시하는 베티버, 패출리 등이 더해졌다”고 덧붙였다. 이를 통해 이솝의 향수가 지향하는 비정형성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로즈 오 드 퍼퓸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패러독스’를 실현하게 되는 것. 남성이 사용해도 전혀 거부감이 없는 건, 향수를 뿌리는 개개인마다 향을 다르게 해석하게 만드는 바로 이 ‘향의 역설’ 덕분. 장미라는 다소 여성적인 노트에서 시작해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전개되는 로즈 오 드 퍼퓸이 남녀 불문하고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 타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데 언제나 개방적이었던 샬로트 페리앙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이솝 로즈 오 드 퍼퓸을 만든 조향사, 바나베 피용.

샬로트 페리앙의 딸, 페르네트 페리앙 - 바르삭(Pernette Perriand-Barsac).
일본의 료칸부터 멕시코, 브라질, 심지어 아마존까지 전 세계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당차게 발걸음을 옮겼을 샬로트 페리앙의 그 대담하고 거침없는 삶의 양식,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다층적이고도 상호적인 시선, 본질적 아름다움을 천착하려는 노력과 그 결과로 탄생한 가구 디자인과 건축 등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에 분명하다. 여전히 샬로트 페리앙 회고전 도록을 펼쳐볼 때마다 큰 감동을 받고 그녀의 삶을 상상하곤 하는 에디터 옆엔 늘 이솝 로즈 오 드 퍼퓸이 놓여있고 앞으로도 쭉 함께 하지 않을까 싶다. 마치 샬로트가 늘 착용했다는 메탈 볼 네크리스처럼 에디터의 후각적인 ‘토템’이 되어주길.

이솝 로즈 오 드 퍼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