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발 입국자 전원 자가 격리 2주 조치’ 소식을 접했을 때는 2주쯤이야 거뜬히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4일은 길고도 길다. 11일 전,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당일에도 우리나라 뉴스에 업데이트되는 코로나 소식을 보며 한국의 상황과 유럽발 입국자 자가 격리 현황을 확인했다. 프랑스의 심각한 상황 속에서 감사하게도 마스크와 장갑을 넉넉히 구했고, 친구가 4시간 아니 (홀로 돌아간 길까지 더해) 왕복 8시간을 운전해 나와 남편을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무사히 데려다줬다.





’자가 격리가 아니더라도 집에서 정리해야 할 일, 작업이 산더미야. 특이한 경험이 되겠다.’ 나와 남편은 프랑스의 이동 제한령에 이어, 우리나라의 ‘자가 격리’, 코로나19로 봉쇄된 지구 안에서의 안전 조치와 기간을 잘 겪어내기로 했다. 격리가 아니더라도 집에 머물러야만 하니까. 그런데 항상 차분한 남편이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를 열더니 굉장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실 게 없다…” 앗. 맥주가 없었다. 냉장고에 항상 맥주가 있어야 한다. 작업할 때나 화를 보면서 한두 잔의 맥주는 필수다. 잠시 말을 잃은 남편. 격리 시작부터 큰 난관에 봉착했다. 우리나라만큼 인터넷과 배달 문화가 잘 돼 있는 나라가 없으니 먹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당당히 말했는데 대부분의 생필품, 음식, 식재료 등은 배달 앱 서비스나 인터넷을 이용해 구입할 수 있지만, 주류는 배달도 온라인 주문도 되지 않는다. (가격대가 조금 있는 전통주와 막걸리 몇 병 등을 제외하고는) 고민 끝에 그의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틀 후 편의점 맥주 16캔이 퀵으로 배달되었다.

격리 첫날.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6시쯤에 잠들었다. 곤히 자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핸드폰을 보니 오전 10시 10분. 담당 직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선생님, 자가 진단 앱 작성 부탁드립니다.” 몽롱한 정신, 흐릿한 초점으로 앱을 열어 열, 기침, 인후통, 호흡곤란 4가지 물음에 아니오를 누르고 바로 다시 잠들었다. 오후 1시 30분에 맞춘 알람 덕에 2시 진단 작성은 제때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3일째, 아침 일찍 담당 직원분께서 간단한 필요 물품과 격리 안내 및 통지서, 마음 돌 봄 상담 서비스 안내지가 든 종이 가방을 현관 앞에 두고 가셨다. 병아리 캐릭터 체온계와 손 소독제, 알코올 스프레이, 마스크 등이 들어 있었다.



〈투표 당일은 오후 5시 30분부터 출발 가능하며, 5시 50분까지 투표소 격리자 대기장소에 도착. 출발 전, 투표소 도착 시, 귀가 후 이렇게 3번의 문자로 통보해야 함. 가는 길에 누구하고도 마주치면 안 됨. 편의점이나 테이크아웃 커피 어떤 곳도 들르면 안 됨. 자차 혹은 도보로 이동해야 함. 대중교통 이용 절대 안 됨〉
그 다음 날 문자로도 외출 수칙 안내가 날아왔다.
격리 4일째이자 투표 당일. 오후 5시 40분. 4일 만에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걸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남편에게 말을 들었을 때는 쌩긋 웃었다. 10일쯤이야 금방이라고 쉽게 여겼었다. 하지만 격리 6일째, 세탁실 옆 분리수거통을 넘어선 일반 쓰레기. ‘이렇게 매일 이 많은 쓰레기를 버리고 살았다니…’ 452ℓ 냉장고의 냉동실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쌓여갔다. 쓰레기가 쌓이니 갇힌 기분도 덩달아 쌓이기 시작했다. 불편해졌다. 갑갑해졌다. 집 밖을 안 나가는 것과 못 나가는 것은 다르다. 자유로이 오갈 수 있을 때 집에 있는 것과 자유를 잃고 집에 있는 것은 다르다. 남편은 죄를 지었을 때 자유를 빼앗고, 작은 공간에 가두는 게 벌이 맞다고 했다. 가두는 것.
“너무 걷고 싶다.”



아슬아슬하게 내민 맨 얼굴에 그 바람이, 향기가 닿기를 한참 기다린다. 많은 게 간절해졌다. 집안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작업을 하다가 새벽 6시를 넘겨 잠에 든다. 잠들기 전에는 평소처럼 영화를 본다. 극장에 가서 보고 싶은 최신 영화는 만 원이 넘는 가격으로 다운로드를 받아야 한다. 참을까 했다가 〈그 누구도 아닌〉을 구입해 봤다. 시간을 거꾸로 배열한 이야기와 편집,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누워서 눈을 감고 화가 왜 좋았는지 어떤 부분이 기억에 남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주고받다가 그에게 물었다.
“격리 해제되면 제일 먼저 어딜 걷고 싶어?”
수학 시험 100점을 맞으면 어떤 선물을 사 달라고 할지 고민하던 초등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간 듯 격리를 잘 마치고 맘껏 걸을, 우리에게 선물할 길을 골랐다. 격리 7일째였다.
미치도록 걷고 싶다. 하루 1시간을 넘게 걷던 2달 전 보통의 하루가 그립다. 지금의 상태로 격리 해제 후 현관문을 열면 곧장 국토 종주도 가능할 것 같다. 상실. 잃고 나야 깨닫는 인간의 우둔함. 우리 집은 약 11평 정도 되는 방 2개, 화장실 1개, 거실 겸 주방이 있는 아담한 빌라다. 둘이 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발코니가 없지만, 근처에 산책길이 있어 매우 만족하며 살았는데. 격리 8일 째에는 갖고 싶은 게 생겼다. “발코니나 베란다가 있었더라면 이 상황을 좀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다음 집은 반드시 발코니나 베란다가 있어야겠다.
파리의 좁은 집에 사는 친구들이 서둘러 시골 부모님 집으로 향한 게 이해되었다. 그들은 아빠의 작은 정원을 걷고, 할머니의 작은 텃밭을 둘러보며 조금이나마 걷는 자유를 얻고 있다. 물론 오래 떨어져 지낸 부모님과 매일 붙어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부모님. 몇 달째 보지 못한 엄마가 제일 보고 싶다. 극한의 상황에는 왜 엄마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를까? 엄마는 깜깜한 밤의 기다리던 보름달처럼 밝게 뜬다. 매일 남편의 누나 반찬과 함께 온 시어머님의 겉절이와 엄마가 택배로 보내준 파김치를 먹는다. 익지 않은 생 파김치의 알싸한 매운맛에 조금씩 쌓이는 스트레스를 줄여본다. 아이폰 오류로 가끔 끊기는 GPS로 담당 직원에게서 6번 정도의 전화를 받았다. “위치 확인이 안 돼서요.” 보호와 감시 사이에서 격리 10일을 맞았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진 지금의 상태가 꽤 갈 것이다. 작은 기침 소리에도 예민해지고, 악수와 포옹은 당분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을 것을 멈추지 않는데 이 위기, 시의성에 적절한 행동이 아닐까…. 나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결론은 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자가 격리 마지막 날까지 남편과 집에 잘 머무는 게 최선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