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 재킷은 Alexandre Vauthier Haute Couture. 화이트 우븐 셔츠는 Chanel. 크리스털 귀고리는 Gucci by ssence.com. 화이트골드와 다이아몬드 링은 Messika. 팬츠는 개인 소장품.
우리가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앉은 건 오후 7시 무렵이었다. 거의 12시간을 연설과 인터뷰로 보낸 폰더는 마침내 샹그릴라 호텔의 프라이빗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앉은 자세는 무척 꼿꼿하다. 모두가 구부정한 자세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제인 폰더의 도도한 자세는 자못 비범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다듬은 문장을 구사하며, 톡톡 튀는 지성을 카리스마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졌다. 제인 폰더는 토론토에서 로레알 파리 에이지 퍼펙트의 자랑스러운 모델로 활동 중이다. 폰더는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그들은 내 나이 때문에 나를 선택했다. ‘이런 나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라고 썼다. “로레알 파리의 생각은 확고해요. 아름다움은 단지 젊음이나 모델의 완벽함에 있지 않고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어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믿죠.” 폰더는 덧붙였다.
소셜 미디어에 정통한 이 82세의 여인은 카메라 시선을 확실히 잡아 끄는 선명한 빨간색의 트렌치코트와 베레 차림으로 시위에 나선다.
제인 폰더의 정체성에는 그녀가 맺어온 관계의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전설적 배우 헨리 폰더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959년에 어빙 펜이 촬영한 사진으로 〈보그〉 커버 모델이 되면서 대중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간의 뉴욕 무대 활동, 궁극의 메소드 연기 코치 리 스트라스버그의 트레이닝을 거쳐 60년대 프랑스영화의 섹스 심벌로 떠올랐는데, 그 시절 그녀는 1968년 작 SF 고전영화인 〈바바렐라〉를 연출한 로제 바딤과 결혼했다. 폰더는 당시 학생운동으로 소용돌이 치던 프랑스에 살며 사회적 정의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강하게 비난하는 반전 운동가로서 정체성을 갖도록 이끌기도 했다. 이때부터 폰더는 전형을 탈피한 심각하고 무거운 인물을 연기했다. 스크린 속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제인 폰더는 일곱 번에 걸쳐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됐는데, 그녀에게 두 번째 오스카상을 안겨준 1978년 작 〈귀향〉과 1979년 작 〈차이나 신드롬〉에서 보여준 변화가 대표적이다. 이 시절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활동가 톰 헤이든과 재혼해 진보적 민주당원으로 변신했다. 제인 폰더는 항상 대중문화의 흐름보다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섰다. 1980년 작 〈나인 투 파이브〉를 통해 직장에서의 불공정한 여성 지위에 꽤 일찍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췄고, 한 시대를 풍미한 책과 비디오 시리즈 〈제인 폰더의 워크아웃〉을 출시하며 사업에 손대기도 했다. 당시 폰더는 남편인 톰 헤이든과 추진 중이던 사회 정의 프로젝트의 기금 마련을 위해 이 사업을 기획했지만, 예상치 못한 덤으로 전 세계에 레그 워머를 유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다음 단계의 제인 폰더는 CNN 설립자인 테드 터너 여사였다. 영화산업에서 잠시 은퇴한 상태였던 그녀는 여성 미디어 센터의 기반 작업을 조용히 수행하고 부부의 근거지인 조지아 주의 청소년 임신을 막는 일을 하면서 90년대와 2000년대 첫 10년의 초반을 훌륭하게 은둔하며 보냈다. 2001년, 그녀가 줄곧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남편”이라 부르는 테드 터너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는 페미니즘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다. 한없이 깊은 물속으로 침잠하여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지낸 뒤, 폰더는 2005년의 히트작 〈퍼펙트 웨딩〉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제인 폰더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빛나는 경력 중 〈퍼펙트 웨딩〉이 바람처럼 거둔 성공은 시위를 향한 그녀의 투지를 호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여전히 시위의 선두에 나서려는 폰더, 즉 진짜 폰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화려한 이미지의 제인 폰더와 상충한다. 어쩌면 제인 폰더의 성공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과 이미지의 상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저는 완전한 모습 같은 건 너무 불편해서 싫어요.” 하지만 제인 폰더는 무엇이든 자신이 하려고만 하면 바르게 해낸다. 또 그녀는 이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인기 TV 드라마에 출연하면 대중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으며, 명성은 그녀에게 활동 근거를 제공하지만 그녀를 낱낱이 까발려 놓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폰더는 통제력을 충분히 단련하지 못한 채 데뷔했던 어린 시절부터 40대까지, 폭식증과 싸우며 보낸 나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녀는 인생에서 외모의 역할을 규정하는 목소리 때문에 항상 힘들었다고 했다. 요즘 제인 폰더는 자신의 사회운동의 파급력을 높이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중이다. 그녀가 소셜 미디어에 정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취한 방법은 정직함을 원칙으로 삼는 것. “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진정으로 정직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아주 긴 투쟁을 벌였어요. 그리고 이제는 초췌하게 보이는 사진들도 그냥 올리죠. 한번은 이가 빠진 모습도 올렸어요! 포르투갈의 한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이가 빠져버렸거든요.” 제인 폰더가 자신의 진실을 밝힌 회고록 〈My Life So Far〉(2005)와 나이 듦에 관한 저서 〈Prime Time〉(2011) 그리고 HBO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제인 폰더 인 파이브 액츠〉(2018)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다른 누구와 연결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찾았다. “나는 그때 진실은 보편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충분히 착하지 않고, 아빠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하고, 충분히 예쁘거나 날씬하지 않으며, 충분히 똑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 모든 여성에게는 보편적인 진실이고요.” 성공적인 경력에도 불구하고 제인 폰더는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남자들과 결혼해 왔다고 한다. 뉴웨이브 영화 스타였던 바딤, 사회 정의의 전사였던 헤이든 그리고 최고의 부유층 거물인 터너와 말이다. 관계는 매번 끝났다. “나는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고, 나는 끝장날 거야’라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주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병이 그녀를 공허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 제인 폰더는 독신이다. 이것은 매우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그녀는 인생의 이번 챕터를 자신에게 바치기로 했다. 인터뷰 중에 제인 폰더는 반복해서 말했다. “난 이제 결혼과 담을 쌓았답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단체 행동이에요. 그리고 여성은 단체 행동을 잘합니다.여성의 장점이고 힘이죠.

파이유 트렌치코트와 르마리 브로치는 Alexandre Vauthier Haute Couture. 골드와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이어링은 Joanna Laura Constantine at Archives. 골드 링은 Charlotte Chesnais at Archives. 팬츠는 개인 소장품.
폰더는 우리에게 앞을 보기 전에 뒤를 돌아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당신의 눈에 띄는 문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정신적 상처가 있어요. 우리는 살면서 그것들을 관리하는 법을 배워요. 그것들을 구석으로 추방하고 꼬리표를 달아 나오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을 배우죠.” 폰더는 “내가 어릴 때, 사람들은 여자를 ‘서로를 쓰러뜨리려 경쟁하는 고양이’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성이 뭉치면 못 이룰 것이 없죠”라고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단체 행동이에요. 그리고 여성은 단체 행동을 잘합니다. 진화론적인 이유로 여성은 개인주의에 영향을 덜 받아요.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여성의 장점이고 힘이죠. 어떤 훌륭한 일도 대중운동 없이는 일어나지 않아요. 세계가 기후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대중운동이에요.” 함께 걸으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제인 폰더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