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바다에서 태어난 티셔츠_요주의 물건 #25

갑갑하고 지루하고 불편하고 두려운 날들. 그러나 어떤 물건은 그 자체의 에너지로 생기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번 주 <요주의 물건>은 세인트 제임스의 줄무늬 티셔츠다.

BY장수영2020.04.01
 
 
새봄을 위한 새 옷으로 트렌치코트와 재킷 중에서 어떤 게 좋을까 고민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우리 앞에 닥칠 줄 몰랐다. 하늘거리는 봄옷이나 화사한 컬러의 립스틱 따위가 무용해진 이 봄날에, 산뜻한 기분을 선사해 줄 옷 어디 없을까? 집 안에만 머물더라도, 입는 것만으로 밝은 에너지를 채워줄 물건이 없을까. 나는 단번에 스트라이프를 떠올린다. 요트와 바다, 여름의 햇빛을 담은 줄무늬 티셔츠를.
 
1963년 영화 〈Naughty Girl〉 촬영장에서 브리짓 바르도 @게티 이미지

1963년 영화 〈Naughty Girl〉 촬영장에서 브리짓 바르도 @게티 이미지

1950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해변에서 촬영된사진 @ 게티 이미지

1950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해변에서 촬영된사진 @ 게티 이미지

줄무늬 티셔츠라면 여러 이름이 떠오른다. 우선 지난 2월 5일에 이 칼럼에서 다루었던 장 폴 고티에, 그리고 누구보다도 줄무늬를 사랑했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 또 다양한 컬러의 줄무늬 티셔츠로 사랑받는 꼼 데 가르송까지. ‘브레통(Breton) 셔츠’라고도 불리는 스트라이프 티셔츠의 초창기 모델에는 21개의 줄이 있는데, 그것은 나폴레옹이 승리한 전쟁의 횟수를 의미한다. 승리의 의미를 담은 브레통 셔츠는 1858년부터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해군 유니폼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프랑스 해군 전체로 확장되었다. 프랑스 해군들과 항해사들이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던 시절, 그 셔츠를 생산해 제공했던 업체가 있었는데, 지금의 세인트 제임스였다.

 
브랜드의 13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세인트 제임스 본사 300명의 직원들이 줄무늬 스웨터를 입고 몽 생 미셸 만을 건너는 퍼포먼스를하는 모습.

브랜드의 13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세인트 제임스 본사 300명의 직원들이 줄무늬 스웨터를 입고 몽 생 미셸 만을 건너는 퍼포먼스를하는 모습.

Ⓒ세인트제임스 홈페이지(www.saint-james.com/fr)

Ⓒ세인트제임스 홈페이지(www.saint-james.com/fr)

세인트 제임스의 로고에는 ‘Né de la mer'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는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의 작은 꼬뮌(Commune: 프랑스의 작은 행정 단위)의 이름이기도 한 세인트 제임스는 1889년, 바다에서 태어난 브랜드다.  
노르망디 지역에서는 18세기부터 영국과의 교역이 활발했고,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은 튼튼한 스웨터를 원했다. 비와 바람으로부터 선원들의 몸을 지켜줄 작업복은 몽 생 미셸의 목초지에서 자란 양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양모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서도 눈에 잘 띄는 블루, 레드, 화이트 세 가지 컬러와 스트라이프 패턴이 더해졌다.
 
1968년, 생 트로페에서 요트를 타고 있는 브리짓 바르도, 알랭 드롱, 그리고 프랑스 요트왕 에릭 타바를리. 에릭 타바를리는 마린룩의 대중화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게티 이미지

1968년, 생 트로페에서 요트를 타고 있는 브리짓 바르도, 알랭 드롱, 그리고 프랑스 요트왕 에릭 타바를리. 에릭 타바를리는 마린룩의 대중화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게티 이미지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경멸(Le mépris)〉 속 브리짓 바르도 Ⓒimdb.com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경멸(Le mépris)〉 속 브리짓 바르도 Ⓒimdb.com

 
세인트 제임스의 초창기 스웨터는 전문 선원들을 위한 특별 매장에서 판매되었지만 요트 경주 대회에 참가한 항해사들이 입으면서 일반인들도 스트라이프 셔츠를 따라 입기 시작했고, 남부 프랑스의 리조트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그렇게 마린룩이 대중화된 이후 세인트 제임스 역시 급성장하게 된다.  
20세기 이후 세인트 제임스는 다양한 라인의 캐주얼 웨어를 만드는 회사로 발전했지만, 전통적인 방법을 기반으로 한 장인 정신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본사 공장에서는 지금도 높은 품질의 재료를 엄선하고, 전통적인 방법과 현대적인 관리 시스템 아래에서 제품을 제조한다. 2005년에는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고 프랑스의 정신을 전달하는 기업’으로 평가되어 사회에 공헌한 기업에 수여되는 EDC Excellence Award에서 “Ethique & Gouvernance" 상을 받기도 했다.  
 
@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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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머물며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국이 된 시기. 우리는 차분한 마음과 참담한 기분을 자주 오가는 기묘한 날들을 보낸다. 이 시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어떤 식으로 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괜스레 봄옷들을 꺼내 걸쳐 보고 다시 집어넣고, 제철재료로 집 밥을 지어 먹고, 시간이 없어 못 보았던 영화와 책들을 꺼내 보다가,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나라는 인간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시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항해를 시작할 테니까. 그때 먼바다로 다시 떠나야 하니까.◉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