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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와 친해지기 #ELLE 보이스

흰 머리, 그 노화의 증거를 '경륜'의 상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오직 남자들뿐, 여성의 노화는 그저 '게으름'의 표상인 걸까?

BYELLE2020.03.12
 

흰머리와 친해지기

어릴 때부터 조지 클루니를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때 시험이 끝나면 영화 비디오를 대여섯 편씩 왕창 빌려다 밤새 몰아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어느 멋진 날〉 〈황혼에서 새벽까지〉 〈피스메이커〉 등 그가 나온 영화는 대부분 봤다. 환하게 웃을 때 잡히는 눈가의 주름, 귓가의 희끗희끗한 새치도 매력적이었다. 그 시절 조지 클루니의 나이는 30대 후반, 지금 내 또래다. 그렇다면 나도 새치와 눈가 주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말이 그렇지, 노화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월요일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 TV 앞에서 남편과 서로 새치를 뽑아주는 건 한 주를 맞이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 의식까지 그만뒀다. 새치가 너무 많아진 탓이다. 하나하나 다 뽑다가는 정수리 숱이 확연하게 줄어들 게 분명했다. 서글펐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술에 취하면 여드름을 짜던 20대와 마찬가지로 안 뽑겠다고 다짐했던 흰머리를 취기에 뽑아버리고 다음날 후회하는 일이 반복됐다.
 
사실 또래 남자 동기와 선후배 가운데는 흰머리를 굳이 가리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꽤 된다. 그래, 연공서열 한국 사회에서 나이 먹은 티 좀 내는 게 대수랴, 다시 한 번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자들은 30대는커녕 40대에도 흰머리를 드러내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두 달마다 정기적으로 염색한다는 비혼주의 여성 선배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처음에는 그냥 다녔는데 ‘너 스스로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노화가 ‘경륜’의 상징일 수 있는 건 오직 남자들뿐, 여성의 노화는 그저 ‘게으름’의 표상인 걸까.
 
이런 문제 인식은 만국 공통인 듯하다. 부지런히 흰머리를 염색으로 감추다 지친 어느 여성이 인스타그램에 ‘그롬브레( Grombre)’라는 계정을 만든 걸 보면 말이다. 은발을 뜻하는 그레이(Grey)와 두 가지 이상의 색을 그러데이션하는 염색 기법인 옴브레(Ombre)의 합성어로,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놔두는 것이다. 현재 이 계정의 팔로어는 16만6000명 남짓으로 해시태그 ‘#grombre’를 검색하면 9만 건의 게시물이 뜬다. 다양한 인종· 국적· 연령대의 여성들이 하나같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자랑하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다. 탈색해서 만든 인위적인 은발보다 훨씬 아름답다. 이 태그를 팔로잉하면서 나도 존재감 있는 은발을 갖고 싶어졌다. 전에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몇 가닥의 흰머리가 왜 더 빨리 늘어나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흰머리를 그대로 두냐 마느냐의 선택권이 있다는 건 한국에선 행복한 소리에 속한다. 아직도 많은 여성이 극단적으로는 립스틱 색깔까지 회사가 정한 ‘용모 단정’의 틀에 맞춰야 한다. 어떤 회사도 대놓고 “늙은 여자는 그만 나가주쇼”라고 말하진 않지만, 여성에게 승진과 연봉 인상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수치가 입증한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국내 상장기업 전체 임원 2만9794명 가운데 여성은 4%(1199명)에 불과하다. 단 한 명의 여성 임원이 없는 기업도 10곳 중 7곳이나 된다. 대졸 여성의 취업률이 1995년 약 15%에서 최근 60%대까지 꾸준히 오르는 걸 감안하면 그 많은 엘리트 여성이 집으로 돌아가거나 저임금 단순노동직으로 흩어졌다고밖에 볼 수 없다. IMF 외환위기부터 최근까지 구조조정 1순위는 맞벌이하는 기혼 여성이었다. 심지어 아나운서 등 일부 직군의 경우, 여성들은 나이 들어서까지 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남성 아나운서는 정규직으로, 여성 아나운서는 프리랜서 계약직으로만 채용한 대전MBC의 한 간부는 “남자는 늙어도 중후한 맛이 있는데 여자는 늘 예뻐야 한다. 늙으면 안 된다는 관점을 방송사가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이 든 여성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나이 들수록 지혜롭고 강인하고 멋진 여자들이 있다. 양희은과 박미선, 이지혜라는 여성 MC 3인 체제로 1년 넘게 호흡해 온 KBS 〈거리의 만찬〉 MC직에서 “우리는 잘렸다”고 만천하에 밝힌 양희은 선생님처럼 말이다. 전통적으로 방송국과 ‘갑을’ 관계일 수밖에 없는 연예인으로서 하차 과정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그녀의 명백한 선언이 아니었다면 성차별적 언행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MC 내정자는 자진 하차를 하지 않고 어물쩡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3명의 MC가 함께한 마지막 회에서 박미선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가 아니라 ‘세상이 바뀐다’로 바꿔달라”고 말했다. 세상은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힘을 모으고 연대하고 고민해야 한다. 서로의 희끗한 머리카락을 응원하면서.  
 
Writer 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 제14회 여기자상을 받은 JTBC 기자. 30여 년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하기도 했다. 더 많은 여성 동료가 함께 일하며 버텨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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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심수미
  • 에디터 이마루
  • 사진 unsplash
  • 디자인 오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