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래도 식기세척기를 사야겠어.” 결혼한 이래 남편에게서 스무 번은 족히 들은 그 말을 그날은 지나칠 수 없었다. 하루치 설거지를 시작한 시간이 이미 자정을 지났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브랜드 거 사고 싶다고 했지? 밀레?” 나의 굳은 결심을 전하고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호방하게 벗어 던지려 했는데, 습기 탓에 잘 벗어지지 않았다. 빨래를 개던 남편은 벌떡 일어나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은 늘 뜻대로만 되지 않는 법. 불과 2년 전까지 딩크족이었던 나에겐 지금 10개월 된 아이가 있다. 나는 아이가 만 4개월이 되었을 때 복직했고, 그로부터 석 달 후엔 이직을 감행했다. “잘됐다! 어디 한번 더욱 열심히 살아봐야지!” 다짐과 달리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나면 몸은 물 먹은 종이처럼 힘을 못 썼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아이 옆에 누워 그대로 잠드는 날도 있었고, 저녁 식사를 밤 11시쯤 겨우 하는 날도 허다했다. 그러면 자정 무렵에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유식이라도 만든 날(3일에 한 번씩 돌아온다)이면 어마어마한 양의 설거짓거리가 생겼다.
자칭 미니멀리스트인 내가 가장 경계해 온 소비 품목은 바로 가전제품이다. 에어컨이 있는데도 부드러운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를 사야겠다고, 강력한 흡입력을 자랑하는 유선 청소기가 있음에도 가벼운 무선 청소기가 필요하다고, 서큘레이터와 실내 공기 질 측정기, 전동 걸레, 스팀 청소기, 로봇 청소기는 물론이고 미생물 음식 처리기와 식기세척기를 구매하자고 주장하는 남편에게 나는 언제나 반기를 들었다. 가전으로 빼곡한 집을 상상하면 갖가지 기기를 수액처럼 꽂고 삶을 연명하는 듯한 기분이 됐다. 그러나 여유와는 한참 먼 일상을 수개월 지속해 보니 알게 됐다. ‘설거지 따위 30분이면 될 텐데 후딱 해버리고 말지’가 당최 통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식기세척기가 우리집에 입주한 날 저녁, 나는 개수대에 쌓인 하루치 설거짓거리를 처음으로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냄비, 국자, 프라이팬, 도마부터 수많은 볼과 접시와 컵을 차곡차곡. 뭐든 살짝 기울여 담아야 잘 씻긴다는 설치 기사의 조언대로 식기들을 정렬했다. 씻어야 될 것들을 겨우 절반 정도 넣었을 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고백했다. “우리 정말 식기세척기가 필요했네!” 그와 결혼하고 5년을 식기세척기 반대론자로 살아왔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자정 무렵 시작한 ‘식기세척기에 그릇 넣기’는 5분이 채 되지 않아 끝났다. 헹굼 횟수를 추가하는 ‘안심 헹굼’, 최대 80℃의 온도로 세척하는 ‘살균 세척’, 100℃의 스팀이 분사되는 ‘트루 스팀’의 옵션 코스 버튼을 차례로 누르고 세척기의 문을 닫았다. 그 많은 설거짓거리를 기계 안에 넣기만 했을 뿐인데, 벌써 할 일이 끝났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기술 문명 만세! 나 대신 일해 줄 기계가, 그런 든든한 동반자가 집에 있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식기세척기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다. 나는 2시간 동안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한 편을 시청했다. 무엇을 그렇게 집중해서 감상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이내 딸깍, 세척과 살균 등 주문한 코스를 모두 수행한 식기세척기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기세척기 사용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몇 가지가 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거나, 애벌 세척이 귀찮다거나, 손으로 씻는 게 확실하다는 거다. 애벌 세척이 귀찮다는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그릇이든 대충 헹굼만 하면 끝날 정도로 설거지의 난이도가 낮아진다는 이야기다. 12인용을 사면 자리를 너무 차지하고, 그보다 작은 것을 쓰자니 설거짓거리를 많이 넣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무조건 식기세척기에 많은 자리를 내주더라도 일단 집에 들여놨으면 좋겠다. 솔직히 그 정도 자리는 내줘야 한다. 물론 용량에 대해서는 식기세척기 업계에서 내놓는 가이드와 현실에 차이가 있다. 대개 식기세척기는 4인용·6인용·12인용 등의 제품군으로 나뉘지만 부부와 아이 한 명이 함께 사는 우리 집에서는 12인용이 아니면 효용이 없다고 느낀다. 4~6인용은 1인 가정, 12인용은 2인 이상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이 맞다. 요즘 출시되는 식기세척기는 꽤 스마트하다. 소비자들의 의구심과 아쉬움을 조목조목 개선한 제품이 하나둘 등장하는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봄 4인 이하의 소형 가구에 최적화된 용량의 날씬한 식기세척기를 선보였다. 식기를 쌓아두지 않고 그때그때 세척하기에 적합한 용량이다. 본세척 전 세척기에 설거짓거리를 넣고 물로만 애벌 세척하면 세척한 물의 탁한 정도를 감지해 식기의 오염 정도를 파악하고 세척 시간과 물 온도를 설정해 주는 ‘자동 세척’ 기능이 탑재됐다. 1회 사용할 경우 84원 정도의 전기 요금이 발생한다니 하루에 한 번씩 사용할 경우 월 2520원이 식기세척기에 드는 셈이다. 물 사용량은 손으로 설거지할 때와 비교하면 6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최근 1인 가정의 수요가 늘고 있음을 감지한 몇몇 중소기업에선 ‘무설치 전기 식기세척기’도 출시했다.
식기세척기의 세척 코스는 대체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제품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옵션 코스를 여럿 추가하면 2시간 30분까지도 걸린다. 하지만 나 대신 일해 주는 기계에 설거짓거리를 맡겨두고 〈넷플릭스〉의 쇼 한 편이라도 볼 수 있는 저녁 시간을 얻을 수 있다면 내 손으로 할 때보다 오래 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식기세척기를 사용한 이후에 나는 비로소 저녁이 있는 삶을 산다.